독자 마당

독자 투고

일 2탄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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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치료과에 들어가서는 방학 때, 롯데제과에 다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몬드 빼빼로월드콘. 아몬드 빼빼로는 한 개씩 들어가는 컨베이어가 움직였다. 컨베이어의 움직임은 빨랐고, 작은 칸에 하나 씩 넣다가 정말 구토와 현기증이 올랐다. 아르바이트생 중 쓰러진 이도 있었다. 나는 아몬드 빼빼로를 정말 좋아했는데, 앞으로 먹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하는 사람을 생각해선, 먹으면 안 되는 과자였다.

월드콘은 말이지. 양손에 과자 콘을 열 개 이상 들고 과자가 들어갈 컨베이어에 하나씩 넣어야 했다. 새끼손가락과 엄지로 하나씩 밀어 떨어뜨리면 된다. 콘이 들어가면 기계에 아이스크림이 나오고 자체 포장되어 나온다. 그런데 콘 과자가 손을 벴다. 어이없었다. 과자에 손가락을 베이다니, 그래서 월드콘 라인 일을 할 땐, 열 손가락 마디에 다 밴드를 해야 했다.

아이스크림 는 당시 신상품으로 기계에서 개별포장까지 다 되어 나온다. 사람이 하는 일은 낱개를 모아 한 박스를 만드는 일이다.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게 빠르게 포장을 해야 한다.기계에 문제가 있었다. ‘가 나오다 멈추고, 갑자기 하고 쏟아지기를 반복해서 정신이 없었다.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포장하는 우리는 기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로 아이스크림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일하면서 과자를 몰래 가져오는 이들이 많아 가방검사를 한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가방검사를 떠나 과자를 먹고 싶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물리치료사로 2년을 근무했다. 당시 개인의원은 7시까지 근무를 했다. 나는 급여를 좀 작게 받아도 6시까지 근무하는 조건으로, 나 혼자 근무하는 곳에 들어갔다. 그런데 원장이 내 퇴근 5분 전에 물리치료실에 환자를 보냈다. 처음에 한두 번 받아주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환자 찜질팩만 해놓고 바로 정시퇴근을 했다. 점심시간에도 환자를 물리치료실에 보내기에 나는 찜질팩만 하고 1시간을 누워있게 했다. 원장과 처음에 힘겨루기를 하다가 서로 알맞게 타협을 하고 잘 지냈다. 원장은 부산의료원 원장까지 했던 분으로 제약사 리베이트나 뇌물을 허용하지 않은 분이었다. 내가 이 부분은 정말 인정한다. 좋은 의사다.

원래 음대를 가려고 했던 원장은 서울대 음대를 체력장(박정희는 체력을 최우선했단다.)에서 떨어져 부산대 의대를 갔다고 한다. 원장은 환자가 없을 땐 노래를 불렀다. 또 원장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싫어했다. 아버지도 의사였던 원장이 상고출신 대통령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다. 원장은 부산대 의대를 다니는 딸이 물려받을 수 있도록 작은 병원을 개원했는데, 그 딸은 당시 의대분쟁 때 휴학을 하고 서울대 미대에 갔다.

어떻게 의대보다 미대가 더 돈이 많이 들어가? 미숙아(가명) 너는 공부하지 말고 1억 모아 그냥 시집가라.” 원장이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간호조무사 미숙이에게 말했다.

미숙아, 너 지금 월급 70만원 받는데, 1억 모아 시집가려면 내 나이(당시 31)가 되도 시집 못가겠네.”라며 나는 미숙이를 놀렸다. 미숙이는 대학가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간호조무사로 일터에 나온 친구였다. 아버지가 아팠다. 미숙이는 남동생을 돌봤다. 미숙이는 환경이 어려웠지만, 정말 밝고 멋진 친구였다. 오늘 참 미숙이가 보고 싶네.

여름휴가 23일로 원장과 또 싸우고 나는 수능을 다시 보기로 했다.

마지막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는 과외와 물리치료사로 아르바이트하면서 돈을 벌었다. 임용시험에 떨어지고, 동생이 있던 속초에 가서 기간제 교사를 했다. 특수학교에서 물리치료과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학교에서 교직이수로 치료교사자격증을 따서 정규직 특수교사가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긴데, 오랫동안 치료교사임용은 없었다. 내가 특수교육과에 다니는 동안, 잠깐 치료교사임용이 2년 정도 있었고, 치료교사는 사라졌다. 치료교사로 들어온 사람들은 교육청 연수를 받고 일반특수교사가 된 거다. 나는 아주 힘들게 돌아 겨우 기간제 교사를 하고, 때를 잘 맞춘 후배는 아주 쉽게 정규직 교사가 된 거다. 상대적 박탈감이 정말 컸다. 내 인생에서 열등감이 최고조였던 시기다. 나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당시 내가 맡은 반은 그 학교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반이었다. 보통 다른 학급은 4명 아래, 나는 7명에다가 중증아이들이 많았다. 전학생까지 내 반에 넣겠다는 교무와 싸우고, 담임 업무 외 다른 학교 업무를 더 주려는 주임교사와도 싸웠다. 보통 기간제 교사에게 힘들고 승진점수에 상관없는 잡무를 많이 줬다. 나는 그 학교에 오래 남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당당하게 싸웠지만,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동생과 기르던 복돌이(시츄)가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발톱에 피가 나도록 아파트 문을 할퀴고 난리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자기 손을 물고 머리를 때리고, 엄지발가락 피가 나게 자학을 하는 상천(가명)이와 실랑이를 했다. 집에 와서는 피 묻은 복돌이 발을 보는 나날들이 너무나 힘들었다. 많이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열등감과 상대적 박탈감(후배만이 아니라, 운이 좋아 정규직 교사를 하는 사람들이 동료교사였다.)이 하늘을 찌르고,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영랑호 범바위에 올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중간에 보조업무를 보던 분이 그만뒀다. 우리 반에 공익이 배치됐다. 나는 그 공익에게 상천이만 전담하게 했다. 어느 날, 또 상천이가 문제행동, 이번엔 자해가 아니라 나를 공격했다.

, 너 가만히 못 있어?” 내가 참지 못하고 출석부를 들어 아이를 칠 뻔한 행동을 했다.

, 선생님, 그러지 마세요.” 순간 공익이 상천이를 감싸 안았다. 공익 품에 안긴 상천이 눈빛을 봤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상천이의 눈빛과 뒷걸음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 상천이가 나를 무서워했구나. 상천이는 내가 무서워서 힘들었던 거다. 겁쟁이가 겁을 먹어 자해와 공격행동을 했구나!’ 나는 정말 아이에게 미안했다. 우리는 서로를 오해했다. 둘이 제대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공익덕분에 점점 좋은 선생님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특수학교 공익 중 아이들 돈을 훔치고, 때리는 나쁜 놈, 뉴스가 종종 나온다. 내가 만났던 그 공익은 어떤 선생님보다 아이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특수학생 중에는 사람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힘들어 한다. 상천이는 1년 동안 3명의 담임이 바뀌는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그랬다. 아이가 너무 힘들었던 거다. 나는 상천이 때문에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가, 상천이 덕분에 기간을 채워 일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까먹은 공익요원, 정말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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