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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12) 내가 한 일들 1탄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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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했다. 소매점에서 물건을 가져와 팔았다. 나는 한 번씩 어머니를 도와서, 라면 박스와 과자 박스를 머리에 지고 날랐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첫 노동이다. 우리 반 반장을 길에서 만났는데, 좀 부끄러웠다. 나는 무보수로 일을 하지 않았다. 가게 돈 통에서 돈을 훔쳐, 동네 다른 가게에서 과자나 하드를 사먹었다. 나는 완전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는데, 동네 어른들은 다 아는 범죄였다. 당연히 어머니도. 어머니는 좀 무서운 분이셨는데, 이 일을 모른 체 한 것이 신기했다. 커서 어머니께 이유를 물었다.

애들이 과자가 얼마나 먹고 싶겠어. 집에선 장사한다고 못 먹게 하니 그랬겠지. 그래서 알면서도 모른 체 했어. 빼빼로가 처음 나왔을 때, 가게 한 집 당 몇 개 안 줬어. 진짜 귀했지. 난 인기 상품을 팔 생각만 했지. 너희들을 챙길 생각은 못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냥 너희들부터 먼저 맛보게 하고 팔 걸. 그걸 팔아 얼마를 번다고, 너희들 먹지 못하게 한 것이 미안해.”

해양대학교에서는 학교 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무를 씻고 다듬는 일, 뭐 그런 일을 했는데, 내가 일하는 것을 동기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심지어 부끄럽지 않냐?’는 질문도 받았다. 나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학부터는 내가 벌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학 때,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팔았다. 지하철 가판대가 생기기 전이다. 1995년에 가판대가 생기고 사라진 일이다. 지하철 안에 신문을 들고 다니면서 팔았다. 내가 그 일을 잘했다.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이 왔어요. 신선 신문이요.” 소리쳐 다니면서 팔았다. 신문팔이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서 햇빛을 못 보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해양대 2학년 겨울방학, 해운대 농협에서 서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무과 직원으로 고등학교 동기가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만두고, 그 자리에 일하기로 한 나는 자퇴를 결심했다. 1기 하나뿐인 여자 선배를 한진해운에서 거절했다. 선배가 다른 선사를 구하는 힘든 상황을 지켜보고, 나는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뉴스에도 나고 그렇게 최초의 여자 항해사라고 한 여학생도 취업을 못하면, 나는?’ 내게 졸업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대학생활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다. 그 선배는 여자가 아니라 운동권이라 취업이 어려웠단다. 그 이후 여자 졸업생은 한진, 현대 등 잘 나갔다. 배를 5년 타고 지금은 해수부 고위공무원을 하는 여자 친구도 있다. 나는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내 인생이 여기서부터 꼬였다.

농협 서무는 1년을 하고 그만뒀다. 나는 당시 장사를 하고 싶었다. 제과점. 그래서 부산에서 오래되고 유명한 큰 제과점에 들어갔다. 진열된 빵이 만들어지는 곳은 정말 딴 세상이었다. 더러운 공장. 심지어 케이크의 유통기한이 무한정 늘어나는 걸 보고, 제과점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케이크가 오래되면 겉에 갈라진 크림을 제거하고 다시 새것처럼 바르고 팔았다. 조각 케이크는 마지막 단계다. 더 이상 판매할 수 없는 원형 케이크는 조각내어 팔았다. 한동안 조각 케이크를 사먹지 않았다. 다시 대학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학비를 벌 일을 구했다.

열차 식당에서 홀 보조를 했다. 한화 프라자 호텔이 무궁화 특실, 새마을호 식당차를 운영했다. 식당차를 기억하는 사람은 사십대 후반 이상이겠다. 일하면서 나는 왕따를 많이 당했다. 부산에서 10시 이후 출발하는 기차는 서울역 숙소에서 자고, 다음 날 내려오는 기차를 탔다. 내가 제일 늦은 밤 도착하면, 다른 여직원들이 숙소 열쇠를 갖고 회식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빨리 씻고 자고 싶은데, 새벽까지 놀고 오는 직원을 기다리는 날들이 많았다.

, 그따위로 살면 안 된다. 나중에 후회한다.” 나와 동갑 여직원이 화장실에서 내 어깨를 치며, 나를 협박했다. 나는 이들이 나를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지 몰랐다. 나는 돈을 모아 다시 대학에 갈 생각에 동료직원들과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었다. 교통비를 제외하고 다 저축을 했다. 쉬는 날엔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회사를 그만 둘 때야 내 별 명이 지배인 레이다인 걸 알았다. 식당차 식사가 평균 만 원 이상, 커피도 3천 원 이상으로 당시 물가에 비하면 비쌌다. 계산은 모두 현금으로 받았다. 그래서 직원들 중 손님이 남긴 도시락 반찬을 모아 만원 도시락을 만들거나, 몇 백 원하지 않는 시중 커피믹스를 가져와 커피를 팔고 돈을 빼먹었다. 부산역 주방 직원과 친한 사람은 주방에서부터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 도시락을 받아 팔아서 그 돈을 나눠가지는 일이 많았다.

지배인은 나를 제일 돈을 많이 해 먹는 팀(주방 1, 1)에 보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지배인이 머리를 쓴 거다. 내가 저임금이나 열악한 노동환경을 그런 식으로 보상받는 것에 합류하고 싶지 않은 사람임을 알고는 써 먹은 거다. 나는 한 번도 지배인에게 다른 동료의 문제를 고자질 한 적이 없었다. 비리직원들이 알아서 눈치를 봤다. 보통 홀 보조는 객차에 커피 통을 들고 나가 판매를 하고, 식사시간 홀 보조를 한다.

나를 정말 많이 괴롭힌 팀에서 일할 때다. 객차에 커피를 팔고 오면, 쉬는 시간이 있다. 그들은 나를 홀에 두지 않고 계속 객차에 보냈다. 저희들끼리 돈을 해 먹을 생각과 더불어 나를 괴롭히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참다못한 나는 커피 판돈을 빼돌렸다. 신발에 넣으면 걸릴까봐 속옷에 돈을 넣고 시치미를 뗐다. 마지막 돈 계산이 안 맞아서 고생하는 그들을 보면서 비웃었다. ‘바보 새끼들, 너희는 그렇게 더럽게 살아라. 나는 너희처럼은 안 산다.’

나는 더욱 더 열심히 돈을 모우고 공부했다. 여기서 2년을 일했다. 집에 천만 원을 주고 나머지 천만 원으로 27살에 물리치료 공부를 했다. 나이 들어도 전문직으로 그리고 내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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