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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11) 나의 대학생활들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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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이야기는 할 말이 없다. 남자들 군복무처럼 꿈에 나올까봐 무섭다. 끝없는 공부, 자율학습을 빙자한 타율학습.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는 사직야구장의 전광판이 보였다. 야구가 있는 날, 몰래 야구장을 다녀온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냥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졸다가 등짝만 많이 맞았다. 고등학교 다니며,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 나는 제일 억울하다.

나는 재수를 하는 바람에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가 됐다. 학력고사는 자기가 가려는 대학에 가서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보러 온 여학생이 생각보다 많았다. 많이 떨어지고 해사대학 300명 중 9명의 여학생이 합격했다. 그때가 1993년이다. 나는 해양대학교 기관공학과에 들어갔다.

붙었으면 했던 애는 떨어지고, 제발 떨어졌으면 하는 애들만 붙었다.” 남자 동기가 우리 여자 동기들을 놀렸다. 나는 군대식 학교가 나쁘지 않았다. 딱 내 체질에 맞았다. 급식도 정말 잘 나왔다. 심지어 동아리 여행을 가도 부식을 받을 수 있는 학교였다. 그것도 공짜로.

나는 해양 스포츠 쪽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고 제일 돈이 안 들 동아리로 본 불교학생회를 선택했다. 실수였다. 많은 동아리에서 여학생을 데려 오고 싶어 했다. 나는 직접 동아리 방에 가서 신청했다. 오랫동안 선배들의 환영을 기다렸지만, 없었다. 처음으로 온 선배가 총무였다. 나에게 회비를 걷으러 왔다. 그때, 바로 나왔어야 했다.

나는 군대 체질이라도, 맞는 것은 정말 싫었다. 몸으로 구르고 뛰는 건 괜찮아도 맞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동아리 선배의 옥상 소집, 3학년 선배가 엎드려 뻗기를 시키고, 엉덩이를 때리려 했다. 내가 맞을 수 없다고 일어섰다.

, 너 여자라고 열외하려고 하는 거야? 나는 남자와 여자 차별하지 않아!” 선배가 소리쳤다.

선배님, 지금 제가 생리중이라 맞을 수가 없어요.” 나는 선배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소리친 선배가 당황했다. 나는 열외를 했다. 당연히 나는 생리를 하지 않았다. ‘병신 새끼, 그래도 우리가 대학생이다. 때리고 맞고 살아야겠니?’ 나는 때리지도 맞지도 않았다.

내가 2학년이 되고, 후배가 생겼다. 3학년 선배는 실습선을 타고 있어, 2학년이 기숙사에서 1학년 후배를 통솔했다. 여학생 기숙사는 남학생 기숙사와 붙어있지만, 철문이 크게 막고 있었다. 해양대학교 해사대학은 아침 운동장 조례와 저녁 기숙사 점검이 매일 있었다. 나는 철문 밖 남학생의 훈련(얼차례) 소리에 버금가게 철문을 발로 차면서 큰소리를 쳤다.

우리들은 대학생이고 성인이다. 물리적 폭력으로 소통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밖에서는 여학생들이 벌 받는 걸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여학생 기숙사만큼은 폭력이 통하지 않게 했다. 내가 딱 2학년만 다니고 학교를 자퇴했다.(자퇴는 일터 이야기에서 다루기로 한다.) 우리 기수에게 물리적 폭력을 경험하지 않았던 후배들이 폭력적인 선배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많이 맞은 기수들이 더 폭력을 쓰지 않고, 안 맞은 기수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기현상을 봤다.

아침 구보 생각이 난다. 선배들이 먼저 학교 앞 방파제를 돌아 뛰어 오면, 후배들은 고개를 숙이고 선배를 쳐다보면 안 된다. 여학생은 수가 작아 1학년과 2학년이 남학생들 달리고 제일 마지막에 뛰었다. 이제 2학년이 된 남자 동기가 신나서 여학생들이 구보하는데, 큰 소리쳤다.

어디서 고개 빳빳이 쳐들고 뛰는 거야? 고개 숙여.”

아 시팔 개새끼야, 아가리 닥치고 뛰어, 아가리 찢어 놓기 전에.” 여학생 조교였던 내가 냅다 소리를 쳤다. 1학년만 아니라 2학년 여자 동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내게 욕을 먹은 놈이 달려들려고 했지만, 다른 동기들이 말렸다. 그 후 2학년 남학생들은 여학생 구보 중에 욕하는 놈이 없었다. 나도 그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심한 욕을 한 날이다. 믿어줘.

나는 해양대를 자퇴하고 여러 일들을 하다가 수능을 치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지금 부산 가톨릭대학 전신인 지산대학 물리치료과에 27살 나이로 들어갔다. 다행히 여긴 졸업을 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나는 참 가난한 아이들과 뭉쳐서 다녔다. 우리들은 학교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것도 부담이 됐다. 그래서 밥을 해 먹기로 했다. 내 사물함엔 책이 아니라 코펠과 버너가 들어갔다. 강의실에서 또는 운동장에서 우리는 눈치껏 밥을 해 먹었다. 나중에 학교 산학협동 프로그램으로 제공된 사무실을 얻어서 편하게 숙식을 해결했다.

나는 해양대학교부터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나는 물리치료과에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은 예측불허, 29살 졸업반 때, 9년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졸업을 하고 집근처 병원에서 일을 했다. 교사인 동생이 집에서 한 달 여름방학을 보내는데, 나는 고작 23일 여름휴가가 다였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동생은 나를 수능중독이라 놀렸다. 나는 매번 아쉽게 실패했다. 수학과 영어가 돌아가면서 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놓친 과목에 매달렸다. 이번에 점수회복을 하면 된다는 생각에 수능을 좀 많이 봤다. 믿거나 말거나, 조금만 잘 하면 서울대도 가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전남대로 통합된 여수대학교 특수교육학과에 2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내 영어점수가 또 너무 아쉽게 4년 장학금과 매학기 50만원 현금 지원비를 못 받게 했다. 나는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이미 나는 교양과목이 넘치는 사람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이 힘들었다. 내게 이 학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한 직업훈련소였다. 조기졸업을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데 정말 여수에서 나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너무 우울했다. 늙고 돈도 없는 상황이 힘들었다. 입학 시, 졸업생 전원이 임용시험에 합격했는데, 내가 졸업할 때는 쉽지가 않았다. 나는 임용에 떨어졌다. 계속 떨어졌다. 내 꿈은 정말 소박했다. 평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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