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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투고

10. 할아버지의 장례식과 제사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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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병원에 나와서는, 집에서 물도 한 모금 드시지 않고, 1주일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어. 내가 물을 드려도 절대 드시지 않았지. 할아버지는 정말 주무시듯이 편하게 가셨어.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게 위해 내가 가슴과 숨을 확인했는데, 꼭 살아계신 것 같았지.”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말씀하셨다. 이십년 전 일이다. 요즘 같으면, 할아버지 사망은 경찰에 신고 접수, 할아버지 시신은 해부되고, 위장에 음식이 없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우리 부모님은 학대살인죄가 적용될 일이다. 나는 요양원에 근무하면서, 억지로 급식을 시키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많이 봤다. 요양원 어르신들은 내 할아버지처럼 편안 죽음을 맞이할 방법이 없다. 법과 윤리는 다르게 움직인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동생과 나는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빠가 우는 것을 보고, 우리 자매는 비웃음을 참았다. 오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오빠는 우리가 모르는 할아버지와 좋은 추억이 있나?’ 글을 쓰는 지금 갑자기 너무 궁금하지만, 이미 늦었다. 할아버지도, 오빠도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이유는, 진짜 죽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야. 할아버지가 조금만 잘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 거고. 물론, 우리들도 고생하며 살지 않았을 거야. 아버지가 원래 얼마나 여리고 순한 사람인데......” 동생은 조용히 나만 듣게 말했다. 나는 동생의 말을 듣고, 너무 놀라고 가슴이 아팠다. 나는 나름 친가 사람들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동생을 보호했다. 동생은 막내로 그래도 오빠와 나보다 상처를 덜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는 동생의 말에서 상처가 느껴져,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알게 된, 동생 마음의 상처. 나는 동생이 너무 불쌍했다.

친가 사람들은 할아버지 장례식에서도 추했다. 아버지 개인택시조합과 지인들이 많이 다녀갔다. 아버지께서 방명록을 보려는데, 못 보게 했다. 삼촌과 고모는 아버지에게 장례식비용만 요구하고, 돈의 씀씀이는 알려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부조금이 얼마 들어왔는지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고 찾아 온 지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하니, 방명록을 보게 해다오.” 아버지의 말은 무시당했다. 그들은 장례식장에서 노래하고 춤추기까지 했다. 또 싸우고 노래하고 춤추고 미친 사람들 같았다.

몇 해 지나 아버지의 계모,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악을 쓰다 가셨단다. 당시 나는 여수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 몰랐는데, 어머니가 친자식이 안 모시는 할머니를 마지막에 우리 집에 모시려고 했다. 동생이 단호하게 반대했단다. 동생은 할머니가 집에 오면, 어머니를 안 보고 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두 분 장례식을 끝내고 1년 뒤, 마지막 제사를 했다. 자신의 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앞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을 거다. 내 아들에게도 제사를 물려주지 않겠다. 나와 너희 형수가 환갑이 되도록, 우리는 도리를 다 했다고 본다. 우리 부부도 늙었다. 제사를 모시기에 힘이 부친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에게 제사를, 또 앞으로 올 며느리에게 제사를 못 하게 할 거다.” 아버지는 결정은 단호했다. 아버지의 배다른 동생들은 자기들끼리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부모님과는 연락을 하지만, 우리 남매는 친가와는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나는 어머니와 명절과 제사음식을 준비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명절에 전 붙이는 걸로 뭐라 하는데, 전 붙이는 건 일도 아니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음식 손질하는 것이 더 일이 많다. 지금보다 더 복잡했던 옛날 재래시장의 명절 장보기, 나는 어머니를 따라 내 몸 같은 짐을 들고 다녔다. 일하는 것은 하나 도움을 주지 않던, 친척들은 모두 음식 보따리를 챙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용히 돌아가지 않고 꼭 상처 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아버지는 제사 중에서 기일을 모르는 조상들을 모아 합동으로 치루는 제사를 정말 싫어했다. 아버지의 어머니, 기일을 몰랐다. 할아버지의 무정함. 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우리 가족 모두의 상처로 남는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예전 작은책 글쓰기에서 둘째 며느리 분이 명절에 대한 글을 적었는데, 나는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본인이 아파서 큰집에는 못가고, 아들들만 보냈다는 글에 말이다. 내 어머니가 막장 집안의 맏며느리라서 나는 더 잘 안다. 일손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식객들만 보내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시조카들 돌봄까지 무한 노동력을 착취당한 어머니를 나는 가까이서 보면서 컸다. 나또한 엄청난 노동 착취를, 지금은 아동학대라 부를 만한 일들을 당했다. 나는 장남과 결혼했지만, 다행히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나는 전통적인 명절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일하지 않은 자들이여, 가족 모임에서도 먹고 놀지를 마라!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제사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동생들과 이야기를 끝낸 후, 우리 남매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희 어머니와 나는 시신기증신청을 했다. 우리는 장기기증도 하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한다. 우리들의 시신기증에는 자식들의 서명이 필요하더라. 너희들이 여기 이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 좋겠다. 우리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거다. 죽으면 바로 시신을 기증하고 납골당에 모시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일에 너희들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것이 우리 부부가 원하는 거다.” 우리 남매는 부모님 의견을 존중하고 바로 도장을 찍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그래도 부모님의 죽음과 장례와 관계된 문제인데, 우리 남매가 너무 편하게 받아들어 섭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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