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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끝) 일 3탄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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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초에서 계약 종료 후 서울로 왔다. 이번에 나는 마사지 가게를 차릴 생각을 하고 강남의 타이마사지 가게에 들어갔다. 거기서 한 4달을 일했다. 강남 부자와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지금도 텔레비전과 홈쇼핑에 많이 나오는 뚱땡이 한의사가 단골이었다. 나는 그 일행 중 하나를 상대하면서 그의 말을 엿들었다. 방송국 피디도 한의사에게 굽신 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한의사 옆엔 젊은 미녀가 오빠, 오빠하면서 붙어 있었다. 방송으로 보던 한의사에 대한 호감은 심한 반감으로 바꿨다. 그는 돈만 밝히는 사업가였다.

나는 마사지 일을 하면서, 내가 사람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만 배웠다. 더불어 나는 여러 사람이 아닌 내가 해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마사지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참 여기 일하다가 호스트바에 처음으로 가봤다. 나는 회비가 아까웠지만, 급하게 술을 마시고 빨리 빠져나왔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힘들게 번 돈을 참 이상하게 쓰는 사람들을 동료로 만났다.

마사지 가게에서도 살짝 왕따를 당했다. 이번엔 왕따를 즐겼다. 같이 놀자 하지 않는 것이 내겐 더 편했다. 나는 야간 일을 하고, 낮에 영화를 보고 혼자 압구정을, 강담을 돌아다녔다. 에르메스 매장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도 가고 혼자 잘 돌아다녔다. 나는 이 번 생에 내가 절대 갖지 못할 것들을 구경하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은 없었다. 그냥 낮 시간을 즐겼다.

거기서 나는 지명도(단골손님)가 낮아, 돈을 제대로 벌 수 없었다. 그래서 빨리 정리하고 나왔다. 연예인과 돈 많은 강남 사람들을 많이 봤다. 부럽진 않았다. 그때 내가 돈을 좀 벌었으면, 코와 치아 성형을 했을 거다. 압구정은 성형외과 광고가 넘쳐났고, 나도 유혹에 넘어가는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돈을 못 벌어 정말 다행이다. 일을 그만두자, 동생이 내게 말했다. 어머니가 내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단다. 그렇게 공부하고 겨우 마사지 가게에서 밤일을 한다고 말이다. 사실, 그때 내가 살이 많이 빠졌는데, 어머니는 그게 더 속상했다고 한다.

숙식이 제공됐던 압구정 마사지 가게를 나와, 충암고등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저렴한 방을 구했다. 연남동에 있는 요양원에 물리치료사로 일했다. 오전 9시부터 13시까지 근무하고 100만원을 벌었다. 적게 벌어 적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출퇴근은 1시간 이상 걸었다. 시간도 많고 만원버스에 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쉬는 날은 걸어서 길상사에 가서 밥을 먹고 왔다. 나는 가난하게 잘 사는 방법을 찾았다. 문제는 1년이 지나갈 쯤, 원장이 재계약을 하자며, 전일제로 오후 4시까지 일하는 것을 제안했다. 4대 보험과 세금 포함 월 150만원을 말했다. 나는 처음에 실수령 150만원으로 듣고 계속 일하기로 했다. 실수령이 아닌 걸 알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원장에게 실업급여를 받겠다고 하니, 내가 다른 직장 구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실업급여를 받고 싶어, 3달 단기 기간제 일자리를 구해 요양원을 나왔다.

이상하게 퇴직하기까지 원장과 사무실 실장 시누이가 나에게 잘해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파트타임이 아니라 전일제로 근무한 걸로 서류를 올리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원장 시누이는 요양보호사로 올려놓고는 사무실에서만 있었다. , 그들은 내가 그걸 알고 신고를 할까봐 잘해줬던 거다. 나는 퇴직하고 신고를 고민했지만, 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공범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 치료서류가 그들에 의해 수정되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오랫동안 두고 본 것은 명백한 내 잘못이다. 나는 비리에 눈감았다.

서울에 1년을 살면서 나는 작은책 강연과 글쓰기 모임에 나갔다. 당시 강연 후 뒤풀이를 하는데, 나는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것과 술 먹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강연비는 그렇다 치고, 뒤풀이 비용 만원이 내겐 너무 아까웠다. 나는 뒤풀이 비용 아낀 걸로는 혼자 세븐스프링스 같은 곳에 가서 느긋한 낮 식사를 즐겼다. 당시 점심 메뉴로 나온 치킨이 만 오천 원 정도였나, 이만 원이 넘지 않았다. 주 메뉴는 포장을 해서 집에 가져가고, 식당에서 나는 샐러드 바를 공약했다. 나름 전략적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연천의 작은 초등학교 특수반에 3달 기간제 교사로 들어갔다. 3달만 하고 나오려고 했던 것이 3년이나 일하게 됐다. 나는 그 곳에서 다시 임용 준비를 하면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운동장을 걸었다. 학교 옆 작은 교회의 새벽 예배시간, 통성기도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신이 교회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이 없는 곳에서 신을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낯설고 기이했다.

시험도 떨어지고 겨울 철 난방비를 아끼다가 그만 동파사고를 일으켰다. 내 관사를 비롯하여 빈 관사들 모두 동파가 될 상황을 만들었다. 그래서 잘못하면 기간제로 일했던 돈을 다 수리비로 내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좀 부끄러웠다. 세상에 난방비 아끼다가 얼어 죽을 뻔 했다. 나는 세상에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같이 느껴졌다. 눈이 많이 온 다음 날 아침, 관사를 나온 더더욱 우울해진 나는 꽁꽁 언 소나무를 보고 엉엉 울었다. 나는 나만 춥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나무가 있었다. 나보다 더 힘든 겨울밤을 견딘 소나무를 보고 반성했다. 그리고 소나무와 친구가 됐다. 심지어 소나무가 괜찮다고 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소나무가 말했다.

이 남자가 네 남자야. 그리고 앞으로 너는 혼자 추운 겨울을 보내지 않을 거야.” 소나무가 맺어준 그 남자 덕분에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지 않고 살게 됐다.

나는 요즘 글을 쓰면서 꿈꾸는 게 있다. 시트콤 같은, 코믹한 장르의 글을 쓰고 싶다. 요양원 어르신이 주인공이고 특수학교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걸로 말이다. 장애 극복이나 인간승리와는 전혀 상관없다. 특히 연민과 동정과는 더 거리가 먼, 그냥 노인은 노인의 삶 자체의 웃음과 장애인 삶 자체의 웃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잘못하면 노인비하와 장애인 비하가 될 수 있는 소재라 조심스럽다. 그냥 시설에 있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일상을 살아간다. 나는 그 이야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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