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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준비(2)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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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25일 오전 9, 호스피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제 밤부터 오빠가 의식을 잃고,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단다. 임종준비를 해야겠다고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 오빠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진행될 줄 몰랐다. 오빠의 임종을 내가 지키고, 또 오빠의 장례도 내가 알아서 한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충북대의대 해부학교실에 전화를 했다.

시신기증에 대한 문의를 하고, 충북대에 기증하기로 한 가족입니다. 지금 호스피스 병원에서 임종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족 장례식을 끝내고 저희 쪽으로 알려주시면, 저희가 모시러 갑니다.”

저희 가족은 따로 장례식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곧 추석 연휴가 시작입니다. 이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연휴기간에는 저희가 바로 모시지는 못합니다. 먼저, 충북대 병원 장례식장이나 가까운 장례식장으로 옮기시고, 저희가 나중에 학교로 모시고 옵니다. 그 상황이 발생하면 전화를 한 번 더 주십시오.”

오전에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던 호스피스 병원에서, 오후에는 다급히 나보고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남편에게 비행기 표를 부탁했다. 새언니가 저녁에 오빠를 만나고 갔다. 산소 호흡기를 한 오빠의 사진을 보냈다. 내가 병원에 가서 오빠 옆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밤 930분 청주행 비행기를 탔다. 내가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언제 도착하실 수 있나요?”

지금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12시 전에 도착하시겠네요. 1층에 말씀드려 놓겠어요. 도착하시면 또 바로 전화를 주세요.”

병원 입구로 들어서는데, 어머니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내일 첫차를 타고, 아들을 보러 온다고 한다. 나는 내일 동생과 같이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동생이 일하고 또 운전하는 것이 힘들다고, 혼자서 병원을 찾아오겠다고 억지를 쓴다. 지금 어머니를 상대할 시간과 힘이 없다. “엄마, 나는 지금 오빠 옆에 가야돼. 엄마 힘든 거 아는데, 내일 동생과 상의해서 오세요. 저는 지금 오빠를 지켜야 해요. 제가 엄마까지 걱정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미안하다. 빨리 성남이에게 가봐라.” 어머니는 겨우 진정하고 나를 보내줬다.

아버지는 차마 오빠의 임종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새언니가 엄마에게 오빠의 아픈 사진을 보낸 것에 화가 나셨다. 아버지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동생은 아버지가 나중에 오빠를 만나지 않은 걸 후회할까봐 걱정했지만, 어머니만 모시고 내일 온다고 했다.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나 서로 원하는 데로, 최대한 해주기로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새언니, 우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코로나19로 병원 입구에서 소독을 하고, 비닐 옷을 입었다. 임종실에서 오빠를 만났다. 오빠는 산소 호흡기를 하고 아주 힘겹게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서 엉엉 울었다. 세수를 하고 왔다.

어제 저녁부터 섬망 증세가 나타나면서 욕을 심하게 했어요. 그러고 의식을 잃었어요. 암이 아마도 뇌까지 퍼진 것 같아요. 오시기 전에도 위험한 고비가 있었어요. 열이 많이 나서 해열제를 투여하고, 지금 몸에 아이스팩을 하고 있어요.” 당직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내 손보다 작은 오빠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야, 내가 왔다. 그래 고생했다. 고생했어.”

간호사에게 내일 어머니가 병원에 오시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오빠가 기다릴 수 있는지 물었다. 간호사는 새벽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간호사가 나에게 편하게 있으라고 하며 임종실을 나갔다. 임종실은 간호사실 바로 옆에 있다.

새언니가 병원에 도착했냐고 문자를 보냈다. 오빠의 사진을 보내고 내가 옆에 있다고 알렸다. 새언니가 우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새언니와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새언니가 오빠에게 어떻게 말을 전할지, 그게 또 오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언니에게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새언니 베트남 장례식은 보름 넘게 이어졌다. 새언니는 작년에 4살과 7살 아이를 시부모님께 맡기고, 친정어머니 장례식으로 베트남에 갔었다. 작년 여름이었네. 어머니는 출혈로 응급실에 가고, 내가 아이들을 맡았다. 우리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새언니는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만 3세도 안된 아이를 두고, 그렇게 오래 떠나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니 말이다.) 나는 앞으로 새언니에게 우리가족의 이상한 장례식과 오빠의 시신기증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

먼저 오빠에게 이야기를 했다.

오빠 미안해. 오빠에게 물어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 부모님도 이미 오래 전에 시신기증신청을 했잖아. 그리고 납골당도 만들지 않겠다고 했지. 오빠도 그렇게 하려고 해.”

오빠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빠는 오른쪽 눈은 감고, 왼쪽 눈은 반쯤 뜬 상태로 멍한 눈동자는 바깥으로 향해 내 말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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