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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너희들 대신 무대에 서서 놀아 볼게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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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이소현 감독의 <장기자랑>

 


엄마가 너희들 대신 무대에 서서 놀아 볼게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애들 어릴 적에 세 아이를 업고 안고 있는 저희 부부를 보면 선배 부모들은 그때가 좋을 때라면서 부러운 눈길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때의 저희는 그 어른들이 부러워하는 먼 미래는 상상도 못 한 채 애들이 빨리 크기만을 바랄 뿐이었어요. 시간은 금방 흘렀고 이제 그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경제적 독립은 아직이지만, 아이들은 각자 일이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듭니다. 얼마 전 잠깐 시간이 났다고 집에 들른 큰애와, 2주에 한 번 집에 오는 둘째까지 오랜만에 온 식구가 모였습니다. 아낀다고 아꼈는데 1박 2일의 시간은 금세 가 버리고 늦은 밤 한 명 한 명 집에 내려 주고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아직까지 몸 안에 차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있는 일인데 이번엔 왜 이런 걸까 생각하는 중입니다.

 

4월 5일에 개봉한 이소현 감독의 <장기자랑>을 보았습니다. 전작 <할머니의 먼 집>이 그랬던 것처럼 슬픔을 마주해야 한다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영화는 밝고 사랑스럽고 따뜻합니다.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생존자 가족으로 구성된 극단 ‘노란리본’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저는 2020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에 대해 알았습니다. 제작 중인 영화를 지원하는 ‘피치&캐치’ 프로그램에서 이소현 감독이 발표하는 것을 보았거든요. 세월호 유가족들 곁에서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멀어진 제 입장에서는 고맙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던 터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영화였는데 드디어 개봉을 했습니다. 세월호 관련 촬영을 하면서 뵈었던 분들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요.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던 예진이와 닮은 ‘조가연’ 역을 맡아 행복한 예진 엄마, 재능도 많지만 늘 더 잘하고 싶은 열정의 영만 엄마, 동수가 가장 좋아하던 만화 캐릭터 루피가 된 동수 엄마, 순범이처럼 모델을 꿈꾸는 ‘방미라’ 역을 맡은 순범 엄마,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정신적 지주 수인 엄마, 생존자 학생 애진 엄마, 주인공이 아니어서 좋은 윤민 엄마까지, 엄마들은 아이들의 흔적을 연극으로 구현하며 특별한 추모를 이어 갑니다. 

 

세월호 참사가 계기가 되어 시작한 연극에서 주인공들은 배우로 성큼 발돋움합니다.

 

<장기자랑>을 먼저 본 관객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이런 애도가 가능하다니”. 주인공들이 단원고 학생들의 엄마들이기에 관객이 세월호라는 단어를 잊기는 쉽지 않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주인공들은 피해자라든가 유가족이라는 단어보다 배우라는 이름으로 더 다가옵니다. 처음엔 마지못해 시작했던 연극이었지만 연극인 김태현 감독은 특유의 유쾌한 에너지로 엄마들을 설득했고 “그렇게 리딩을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단원노인복지관 무대에 서 있더라고요.”(수인 엄마) 관객에게도 배우들에게도 좋았던 그 경험 이후 엄마들의 태도는 “완공연 할 때에는 조금 더 비중 있는 배역을 달라”고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좀 더 완벽한 무대를 위해 늦은 밤까지 유튜브 영상을 보며 춤 연습을 하고 추모공원에 있는 아들을 보러 가는 차 안에서도 “경찰청 창살 철창살”을 외며 발음 연습을 합니다. 배역을 둘러싼 엄마들의 신경전을 보다 보면 빙그레 웃음이 머금어지고 교복을 입은 무대 위 공연 장면에는 엄마들의 나이를 잊게 됩니다.

 

주저하는 엄마들을 위해 김태현 감독은 아주 재미있는 코미디 대본 읽기부터 시작합니다.

 

2015년 10월, 심리 치유를 위한 희곡 읽기 모임에서 시작했고 극단 창단이 2016년이었으니 엄마들이 어엿한 배우가 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네요. <장기자랑>은 극단 ‘노란리본’의 세 번째 작품이자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이 이 연극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싱그러웠던 아이들의 모습과 그들이 소망했던 꿈을 아이들이 되어서 구현했기 때문이겠지요. 공연이 끝난 뒤의 무대인사나 간담회 자리에서 늘 주인공들은 자신을 누군가의 엄마로 소개합니다. “‘예진 엄마’라고 소개를 하면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더 예진이를 찾아보겠지.” 예진 엄마의 소망은 주인공들이 더 좋은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를 자연스레 설명해 줍니다.

 

연극 속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엄마의 몸을 빌려 아이들은 아름다운 바다 앞에서 탄성을 지르고 엄마들은 아이들이 못다 펼친 장기자랑을 무대에서 마음껏 펼칩니다. “엄마가 대신 그 무대에 서서 한번 놀아 볼게.”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아이들 대신 무대 위에서 웃고 즐기는 엄마들의 모습은 참사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 줍니다.
엄마들의 시간을 7년 동안 기록한 영화. 그런데 영화 어디에도 밥을 먹는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엄마들이 이소현 감독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소현 감독은 말합니다.

 

“슬픔을 가진 사람의 욕망을 보여 주는 건 불경스러운 일인가? 고민도 많았지만, 이런 것들이 감춰질수록 ‘유가족은 이래야 해’라는 편견이 공고해질 뿐이다. 이번에 그 편견을 넘어 보고 싶다.”

그래서 밥 먹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주인공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기를 바랐던 이소현 감독의 소망은 훌륭하게 이뤄졌습니다.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라는 영만 엄마의 말처럼, 영화는 ‘연극’이라는 새로운 삶의 불씨를 발견하는 엄마들의 열정을 응원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조금씩 전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함께 웃을 수 있는 용기를 전해 줍니다.

 

주인공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조금씩 전진하고 그 모습에 관객들은
웃을 수 있습니다.

 

주말 내내 마음 안에 차 있는 감정을 궁금해하다가 문득 적절한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는 다른 나라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단어들이 있대요. 그중에 ‘hasret’이라는 단어를 새로 알았습니다. 그리움, 상실, 사랑의 조합을 의미한다는 그 단어와 일치하는 우리 말을 저는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넘쳐 났던 시간, 이제는 다시 못 오는 상실의 순간,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고 그 순간을 그리워하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태양이 지고 난 후에도 찬란했던 그 순간의 감각과 기억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는 것처럼요. <장기자랑>의 엄마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했던 당신 안에 있는 그 감정을 한번 느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영화 <장기자랑>은 4월 5일 극장 개봉 후 지금도 상영 중입니다.

(문의: 진진 02-3672-2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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