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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이라도 이겨 보고 싶어요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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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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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이라도 이겨 보고 싶어요

권동희/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

 


그날, 2014년 3월 15일 전국철도노동조합 회의실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어요. 불안해하면서 준비한 병원 의무기록지를 들고 왔어요. 면담 첫날 2시간 넘게 KTX 승무원이자 감정노동자로서 살아온 8년간의 삶을 제 앞에서 얘기했어요. 취객의 횡포와 폭행, 온갖 욕설들, 고객들의 성추행, 신체를 스치거나 일부러 명패가 있는 가슴을 찌르는 행동들, 무릎서비스를 할 때 훑어보는 고객들의 시선 등 가슴속에 담긴 아픈 얘기들을 하면서 눈물을 떨어뜨렸어요. 매일매일 전쟁과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노동이었지요. 잘 몰랐어요, 그렇게 힘들었는지. 

 

당시만 하더라도 KTX 승무원들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었지요. 정규직 채용을 약속한 한국철도공사의 말을 믿고 살아왔던 그들은 2006년 5월 집단 해고된 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 비정규직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어요. 처음에 농성을 시작했을 때 저는 민주노총 법률원에 있었고, 연대의 마음으로 가서 보니 이미 불법파견 진정이 기각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돌아와 법률원 변호사들과 상의해서 다시 법률 투쟁을 진행했고, 일부 작업을 담당하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누구보다 KTX 승무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분들의 오랜 투쟁을 마음 아프게 지켜보았어요. 그러나 2015년 2월 26일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을 부정하는 파기환송 판결이 있었고, 한 분의 안타까운 자살 사건도 있었지요. 당신은 그분들이 해고된 뒤 공사가 신규 채용을 한 노동자라 처음에는 조금 미묘한 감정도 있었어요. 사실 그 감정은 정규직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던 공사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해고된 노동자의 자리를 대신해서 채용된 당신과 동료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요.

 

2018년 4월 5일 현직 KTX승무원과 해고된 KTX승무원 200여 명은 서울역에서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철도공사의 직접고용을 촉구했다. 사진 제공_ 전국철도노동조합

 

무엇보다 당신을 가장 화나게 했던 것은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방관자로 외면하고 있는 회사의 몰상식한 태도였어요. KTX 승무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 특히 문제로 언급되었던 것은 장시간 근로(2연속 왕복, 소위 ‘투투근무’), 휴일 근무의 일방적 지정 등 사실상 강제 근로, 실질임금 소득 저하, 승진 기준의 불명확성, 복지 제도의 미비(숙소 및 근무복의 열악함) 등이었는데, 회사는 승객들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조치마저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부당하고 강제적인 노무관리 때문에 노동자들의 분노가 컸어요. 당시 회사는 상시적인 모니터링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100점 만점 모니터링에서 90점 이하의 경우 팀장 면담, 80점 이하면 반성문 형식의 사유서 제출, 70점 이하면 와우파티에 불려 가서 하루를 시달렸어요. 게시판에 모니터링 순위를 공지하기도 했었고요. 

 

당신은 KTX를 탈 때보다 서울-춘천을 운행하는 ITX 청춘열차를 탈 때가 더욱 심했다고 했어요. 혼자 일해야 하고, 쉴 틈도 없이 검표 업무를 하다 보면 고객들의 항의, 모욕, 협박, 성희롱 등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했어요. 주말에는 기차 안에서 술을 먹는 고객들이 길을 비켜 주지 않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어요. 술을 먹은 승객들의 만행이 더 심해져서 기관실 뒤편에서 거의 매일 울 정도라고 했어요. 8년 넘게 수많은 고객들에게 당해 왔고, 회사의 부당한 노무관리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꼭 한 번이라도, 이번 산재 신청을 통해 단 한 번이라도 이겨 보고 싶어요.”라고 간절히 얘기했어요. 

 

2014년만 하더라도 정신질환은 산재 분야에서 큰 이슈가 아니었고, 감정노동자에 대한 연구도 초기 단계였어요. 그래서 보다 상세하게 당신의 노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동료들과의 면담을 통해 당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하려고 했어요. 무엇보다 열악한 감정노동의 피해가 당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KTX 노동자 대부분이 겪고 있는 문제라는 점도 분명히 하려고 했어요. KTX 승무원 노동조건에 대한 원진녹색병원의 연구보고서도 참고했고, 6명의 동료들과의 면담을 통한 확인서, 당신 본인의 진술서도 증거로 제출했어요. 감정노동과 정신질환에 대한 논문도 참고했고, 가장 많은 연구를 한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김현주 교수님께 부탁해서 ‘업무관련성 평가서’도 받았지요. 그때 당신이 내원해서 김현주 교수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교수님은 최선을 다해서 평가서를 작성해 주었어요. 

 

2015년 3월 19일, 우리는 함께 판정위원회에 참석해서 최선을 다해서 진술했고, 다행히 여러 동료들과 당신의 고된 노력으로 당신의 우울증이 감정노동자의 업무로 인해 비롯된 직업병이라고 판정됐어요(2014 판정 제2229호). 산재로 인정되고 나서 당신은 조금씩 용기가 생기는 듯했고, 삶에 대한 의욕도 더 강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의 사건은 2015년 4월 2일 <경향신문> 1면 보도를 통해 세상에 크게 알려지게 되었지요. 당신은 비록 그 전에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당신의 산재 소식이 알려져서 동료,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다양한 언론을 통해 당신의 기사가 보도되었고, 감정노동자의 정신질환이 노동자 개인 탓이 아니라 회사와 승객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제 세상에서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단 한 번이라도 이겨 보고 싶었다는 그 간절함이 새로운 삶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로 거듭나는 과정과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마웠어요. 저는 당신이 삶에서 어떤 난관에 부딪히든지 잘 이겨 낼 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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