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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장애인 판정, 작은 변화의 시작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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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아내의 장애인 판정, 작은 변화의 시작
 

박준석


내 아내는 조울증으로 결혼 전에도 정신과 약을 복용했다. 주변에서 알고 결혼했는지 물어보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내 친구도 조울증 약을 십수 년째 복용하고 있지만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기에, 또 나도 지병이 있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만난 지 4개월 만에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5년간 재발 한번 없었기에 별 탈 없이 살았지만, 둘째 아들의 돌이 지날 무렵 아내는 너무 힘들다고 호소하더니 그만 6일간 약을 끊어 버렸다. 멋모르고 배우자의 병색을 겪게 된 탓인지, 나는 의사의 만류에도 한 달간 이사까지 감행하며 통원 치료를 시도했고, 이는 좌절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는 시초였다.

 


결국 여차여차하여 2020년 2월, 아내는 병원에 입원했다. 아이들은 소위 '24시간 어린이집'에서 한 달 반 동안 숙식하며 난데없는 불안함과 슬픔을 경험했다. 당시 코로나19가 터진 직후라 너무나 정신없는 시간이었고, 나의 마음도 회오리바람처럼 온데간데없었다. 아내는 가까스로 퇴원했지만 5개월 뒤 재발했고, 작년은 어떻게 넘겼지만 1년간 약을 줄여 가다가 올해 5월에 다시 덜미를 잡혔다.

 

야밤에 아내 때문에 선글라스 끼고 고속도로를 주행해 본 적 있는가? 지난 5월 재발 당시, 아내가 내 안경을 어디에다가 숨겨 놨는지, 베란다 밖에 던져 버렸는지, 안경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묵묵부답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대화를 하려면 전화를 하려면 눈이 보여야 했다. 그래서 자가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낮부터 밤늦게까지 그걸 쓰고 살았다. 가장 고비였던 순간이 바로 그 선글라스를 쓴 채 아내의 입원 수속을 밟고자 야밤에 고속도로를 주행했을 때다. 톨게이트 직원도 뭐라 말을 못 하고 그저 입만 다물었던 기억들…. 불바다를 항해하는 기분이랄까.

 

혼자 발버둥 쳐 봐야 어린 자식들은 멋모르고 내게 달라붙는다. 천진스럽기 짝이 없다. 처가에 도움을 요청해도 출가외인인지 생각보다 뒷전이었고, 고스란히 홀로 지게 되는 짐은 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장모님께 이혼 서류까지 사진 찍어 보내며 극단적 상황 운운해선지, 장모님은 그제서야 발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아내가 퇴원한 후 나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작은아버지께 연락을 드렸다. 혹시 아내가 장애인 심사를 받는 건 어떤지 여쭤보았다. 차별의 시선이 두렵기도 했지만, 되레 작은아버지는 장애인 복지를 말씀하시며 장애인 등록 신청을 권하셨다. 차이를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현명한 것 같았다. 이에 전국 십여 군데 병원에서 서류를 떼었다. 면사무소에 제출한 서류는 최근 1~2년치인 병원 네 곳의 서류였지만, 그 나름 심층 조사하며 아내의 질병 이력을 낱낱이 파헤쳤다. 장인·장모님도 모르고 아내 자신도 모르는 내용을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2004년 우울증으로 시작하여 2005년 조울증 진단을 받아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수차례 병이 재발했지만 그녀의 가족은 먹고살기 바빠 언제 어떻게 아팠는지 제대로 몰랐다.

 

어쨌든 아내는 지난 8월이 되어서야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장애인으로 낙인찍었다며 대놓고 카톡 프로필에 ‘낙인’이라고 올렸다. 나만 그런다며…. 나는 입장 바꿔서, 결혼하고 배우자가 정신병이 세 번 재발해서 뒤치다꺼리 다 해 봤냐고 물어본다. 말이 없다. 그냥 웃는다. 허허허. 불볕더위보다 심한 깊이를 느낀다. 그래도 낙인으로 하겠단다. 그래, 그래라 그럼. 난들 뭐 하루 이틀 어제오늘 이래 살았나? 몇 주가 지나서야 아내는 ‘두 아이 엄마’로 프로필을 변경했다.

 

그렇다. 8월호에 실린 ‘잡초를 없앨 수는 없지만 뽑을 수는 있다’는 글처럼 조울증이라는 잡초를 다 없앨 수는 없지만, 그 큰 빙산의 일각이라도 조금씩 녹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버텼다. 이혼도 생각했지만, 인내해야만 더 복잡함을 면한다는 말에 울컥해도 참고 기다렸다. 이제 작은 변화의 시작인가 보다. 장애인 이동 차량도 이용하기 시작했고, 상담 바우처로 정부 지원을 받아 아이들 훈육하는 요령도 익히고, 장애인복지관에서 무료로 밥 먹는 아내를 보며 ‘아, 이제 혼자가 아니구나’ 싶다. 맛은, 자주 와서 먹지는 못하겠단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며칠 전에는 아이들과 모 천문대를 방문했다. 실내 천체투영실에서 아이들은 어둑한 밤에 꽃핀 은하수 이미지를 보았다. 낮에는 대형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보았고, 저녁엔 진짜 토성의 고리를 보았다. 이제 첫째 아들은 토성에 직접 가 보고 싶단다. 금수저는 물려주지 못했지만, ‘정서’ 금수저로 만들어 주고 싶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면 그보다 좋은 건 없을 것이다. 설령 돈이 많더라도 아이들은 돈보다 부모를 더 찾기 마련이다. 다만 부모로서 오랫동안 애들 옆에 있는 건 좀 힘들 때가 종종 있다. 부모가 아픈데 오죽할까?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면 낫다.

 

워라벨이니, 저녁이 있는 일상이니 하며 혹자는 근사한 인생을 꿈꾸겠지. 물론 그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일하고 먹고 마시는 낙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 다만 우리 가족은 그런 세련된 용어에 익숙지 않아서 다른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작은 변화의 시작이고, 소소한 행복이니까. 꿈이 있는 건 행복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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