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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에 금속노조가를 적었다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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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반성문에 금속노조가를 적었다

 

이미영/ 금속노조 KEC지회 부지회

 

저는 2000년 22살 때 KEC에 입사했습니다. 입사를 하면 한 달간 교육을 받는데 전 바쁜 공장으로 배치되어 교육 없이 바로 현장으로 들어가 교대를 돌았습니다.

 

노동조합은 자동으로 가입이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한 번도 노동조합 문을 열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조합에서 교육이 있으면 참석하고 임단협 기간이 되면 파업도 형식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노동조합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2010년 6월 임단협 교섭 결렬로 전면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매년 그랬듯이 며칠 파업하면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6월 30일 새벽 동료들이 자고 있는 여성 기숙사에 용역 약 400명을 투입시켰습니다. 동료들은 소지품 하나 없이 쫓겨나 정문으로 모여들었습니다.

 

2010년 6월 30일 새벽, KEC는 여성 노동자들이 자고 있는 기숙사에 용역 약 400명을 투입시켜 내쫓았다. 사진 제공_ KEC지회

 

회사는 그렇게 직장폐쇄에 들어갔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회사에 대한 배신과 분노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이 힘들어지는 조합원들이 늘어나고 저 역시 네 살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힘든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조별로 선전전, 천막 사수, 타격 투쟁을 다니면서 동료들이 징계도 되고 해고도 당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김성훈 부지회장은 저한테 알바를 나가라고 했습니다. 전 못 나가겠다고 했지만 나가라고 했고 대신 하루에 한 번 농성장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 투쟁하는 동료들을 두고 알바를 나갔고 야간근무 후에는 아침 집회에 참석하고 낮 근무 후에는 저녁 문화제에 참석했습니다. 알바를 하던 중 관리자가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 혹시 KEC 다니냐’며 이것저것 물어봤습니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압박이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저는 또 다른 알바를 찾아 자리를 몇 번 옮겨야만 했습니다. 정말 비참했습니다. 잠시 알바를 접고 농성장에 합류했습니다. 혼자 있으면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며칠이든 농성장을 지키면서 동료들을 보면서 스스로 다짐하곤 했습니다.

 

2010년 10월 21일 저와 동료들은 급작스럽게 공장 점거를 하게 됐습니다. 밤이 되자 회사는 냉난방기로 온도를 낮게 해서 추위에 떨게 만들었다가 온도를 올려 덥게 만들었습니다. 씻을 세면도구 하나 없어서 화장실에서 퐁퐁으로 머리를 감았습니다. 공권력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항상 긴장했습니다. 전투식량을 받아 하나로 두 명이 나눠 먹고 컵라면 하나 받으면 세상 다 얻은 듯한 기분으로 나눠 먹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저와 동료들은 적응해 가면서 삼삼오오 모여 고스톱을 치고 벽에는 먹고 싶은 것도 적으면서 그 공간에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11월 3일 사회적 합의로 점거 농성은 해제되었습니다.

 

사진 제공_ KEC지회

 

2011년 6월 13일부터 저와 동료들에 대한 회사의 반인권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서문 주차장에는 팻말이 꽂혀 있었는데 창조반, 개혁반, 실천반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옷도 반별로 색깔이 달랐습니다. 창조반은 공장 점거 안 한 사람으로 노란색 티셔츠, 개혁반은 공장 점거 중간에 나온 사람으로 파란색 티셔츠, 실천반은 공장 점거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으로 주황색 티셔츠였습니다. 저는 개혁반이였습니다. 교육실 정면에는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묵언수행을 강요하고 명심보감을 외우게 했고 반성문을 쓰게 했습니다. 반성문에 금속노조가를 적어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회사는 강사의 지시를 어길 때마다 체크를 하고 화장실 가면 시간 체크는 기본이고 용역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더워서 부채질하면 몇 번 했는지 기록하고 일상이 감시였습니다. 또, 시험문제 답을 ‘다나가라, 나가라다’로 출제하는 등 저와 동료들에게 모멸감을 줬습니다. 교육 중간중간 한 사람씩 불러 면담이 진행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고 소지품 검사를 한다는 동료의 말에 휴대폰도 두고 면담실로 향했습니다. 면담실로 가는 길에 잠시 화장실에 들러 녹취기를 켜고 속옷 안에 숨겼습니다. 면담실 문을 열자 박명덕이 앉아 있었습니다. 박명덕은 노조파괴 주범입니다. 손이 떨리고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습니다. 박명덕은 말은 하지 않고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보고 뒷주머니도 보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습니다. 너무 수치스럽고 화가 났습니다. 박명덕은 ‘아무도 현장에 돌아갈 수 없다. 노조 믿지 마라, 당신들을 이용하고 있는 거다. 퇴근 후 정문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퇴근 후 정문에 모였고 6주간 교육은 감시와 면담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총회를 열어 직급별로 월 10만 원부터 20만 원까지 CMS로 걷자는 결의를 했습니다.

 

회사는 우리가 밖에 있는 동안 대체 인력들에게 우리가 용역과 싸우는 동영상을 틀어 놓고 ‘저 사람들은 폭도’라며 주입식 교육을 시키고 우리와는 말 한마디 못 하도록 방어막을 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투쟁으로 관리자의 지배 개입을 무기력화하고 현장을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회사는 2012년 정리해고로 또 우리의 목에 칼날을 겨누었습니다. 겉으로는 경영 위기를 내세웠지만 이미 2011년 초부터 정리해고를 노조 깨기 프로그램 일환으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경영진과 관리자도 고통을 분담하는 방안을 제시하라는 우리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당했습니다. 2년간 임원들은 연봉이 41퍼센트나 인상되어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75명의 조합원들은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동지들은 받지 않은 동지들이 가슴 아파할까 봐, 받지 않은 동지들은 자신들만 살아남은 미안함에 서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회사는 임금 삭감에 동의하면 정리해고를 철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짜 맞춘 듯 어용노조는 상여금 삭감, 무급 순환 휴직에 동의해 줬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현장으로 다시 돌아갈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즐겁게 투쟁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노동위 심판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 회사는 정리해고 철회를 했습니다. 3개월의 투쟁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어 줬습니다.

 

2014년 두 번째 정리해고는 철저히 노동자의 임금을 빼앗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해고가 두려운 것으로 계속 존재한다면 싸움은 앞으로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KEC지회는 이 땅의 정리해고를 없애자는 취지로 집회가 아닌 봄 소풍을 제안했습니다. 해고되는 날 무슨 봄 소풍이냐며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봄 소풍이 진행되던 중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정리해고를 취소한다는 문자였습니다.

 

2014년 회사는 구조고도화 민간 대행 사업을 신청했습니다. 공장 부지에 백화점을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날아가게 생겼고 저와 동료들은 매일 출근 전, 퇴근 후, 주말도 반납하고 나와 구미 전 지역을 돌며 KEC 폐업 반대 서명을 받았습니다. 반대 서명 운동에 6만 명이 참가했고 결국 부적격 결정이 나면서 우리는 일자리를 지켰습니다.

 

회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탄압해 오고 있습니다. 2010년 파업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156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2016년 9월 우리에게 30억 원을 배상하라고 조정안을 냈습니다. 우리는 조정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3년간 조합원 41명이 최저임금을 제외한 임금 전액을 차압당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손배를 받지 않은 조합원들은 CMS 결의로 마음을 보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급별 20만 원에서 40만 원까지 3년간 결의를 했습니다. 퇴사하지 않고 버티며 3년 안에 30억 원을 갚았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이 대단하고 어떤 투쟁이 닥쳐도 당당하고 힘차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투쟁은 즐겁게 해야 지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당한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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