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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길에 핀 꽃을 잊지 않으리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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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정관조 감독의 〈녹턴〉

 


지나온 길에 핀 꽃을 잊지 않으리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이번 호에 준비한 영화는 정관조 감독의 <녹턴>입니다. <녹턴>의 주인공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음악가 은성호 씨입니다. 7월에 이어 8월에도 발달장애인이 주인공인 독립영화가 극장개봉을 하다니 좀 놀랍지요? 극장가뿐 아니라 안방극장에서도 발달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정은혜 작가가 출연하더니 지금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온통 화제입니다. 그리고 현실은 뜨거움을 넘어 처절합니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범정부 차원의 발달장애인 종합 지원 대책 수립, 기존 발달장애인 지원 체계 조정과 개편, 발달장애 24시간 돌봄 지원 체계 구축 등을 위해 전국 곳곳에 ‘죽음을 강요당한 발달·중증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분향소’를 차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녹턴>이 8월 18일에 개봉합니다. 저는 2019년에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녹턴>을 처음 본 후 개봉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개봉을 합니다. 그런데 3년 전 그때의 마음과 지금은 또 다르네요. 코로나로 힘든 삶 때문에 발달장애인 가정의 슬픈 소식이 자주 들리더니 최근에는 동반 죽음이 같은 달에만 세 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녹턴>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많이 고민됩니다. 

모처럼의 가족 모임이지만 싸움으로 끝나고 맙니다.

 

<녹턴>을 만든 정관조 감독의 SNS에 가 보면 ‘2008년 6월 9일 첫 촬영, 2022년 8월 18일 개봉’ 게시물이 상단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장장 14년이 걸렸네요. <녹턴>은 자폐인 음악 청년 은성호 씨와 동생 은건기 씨 그리고 엄마 손민서 씨의 노력과 긴장,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 낸 영화입니다. 영화 초반부에 엄마의 관심을 목말라하던 고등학생 건기 씨는 영화가 끝날 즈음엔 형 은성호 씨의 보호자로 변해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음악인의 성장영화’라고 하기에는 동생 건기 씨의 비중이 참 큽니다. 건기 씨가 보는 가족사는 이렇습니다.

“엄마가 나도 버리고 아빠도 버리고 다 버리고 엄마 인생도 버리고 형한테 올인했으니까 그래, 그거 끝까지 가 보고 그게 끝까지 갔을 때 그게 잘됐으면 좋겠어.”

형제는 같이 음악을 시작했지만 건기 씨는 중도에 그만둡니다. 형 성호 씨보다 재능이 부족해서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영화 제목이기도 한 ‘녹턴’은 영화 속에서 여러 번 흘러나옵니다. 민서 씨는 건기 씨에게 자기 제삿날마다 들려 달라고 할 정도로 ‘녹턴’을 좋아합니다. 건기 씨의 연주를 들으며 민서 씨는 혼잣말을 합니다.

“성호가 할 때에는 이 느낌이 안 나….”

엄마 손민서 씨의 24시간은 은성호 씨와 함께입니다.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는 건기 씨에게 “형 지키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너는… 네가 지켜야지.”라고 말하는 민서 씨의 편애는 너무 심하다 싶지만 현실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지하철을 타면 옆자리 사람의 휴대전화 화면을 대놓고 들여다보고 조금만 불편해도 돌발 행동을 하는 성호 씨를 엄마 민서 씨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건기 씨는 자주 혼자입니다. 3년 전에 봤을 때에도 학교 담벼락 앞에 쭈그려 앉은 채 악보를 보던 건기 씨 모습에 울컥했는데 이번에 다시 봐도 그 장면은 여전히 찡합니다. 그날은 건기 씨의 콩쿠르였고 엄마는 오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엄마에게 연주하다가 땡 쳤다고 투정을 부린 직후에 건기 씨는 그렇게 쪼그려 앉아 있었던 겁니다.

 

성호 씨가 차근차근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히는 동안 건기 씨는 홀로 세계를 떠돕니다.

 

“피아노, 클라리넷, 바이올린 다 하면서…. 엄마가 다 해 줘서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컵라면에 물 부어 먹을 줄도 몰라요. 내 입장에서는 눈꼴시죠.”라고 말하던 고등학생은 “형은 엄마가 없으면 안 되지만 나는 엄마가 없어도 되거든.”이라고 말하는 청년이 됩니다. 형 성호 씨가 차근차근 성장해 가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히는 동안 건기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휴대전화 판매 일을 하거나 여행 가이드 일을 합니다. “서른 살 되기 전의 실패는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사업들이 순조로운 것 같지는 않지만 일찍부터 혼자가 되는 법을 배운 탓인지 그저 덤덤합니다.

 

영화 소개 글을 쓰겠다는 제게 자료들을 다 보내 주면서 정관조 감독은 “중요한 부분은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 빼고 쓰는 중입니다. 다만 아파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3년 전에도 울컥했던 장면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릴게요.

연주에 심취해 있는 건기 씨를 멀리서 엄마 민서 씨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카메라에 가득 담긴 것은 건기 씨인데 카메라 한 귀퉁이에 건기 씨를 바라보는 민서 씨가 보입니다. 그 표정. 더 약하고 여린 자식을 더 많이 돌볼 수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 그리고 어느새 쑥 자랐고 음악인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둘째 아들. 하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할 수만은 없는 현실적 한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발달장애인 지원 체계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분향소를 차리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형제는 엄마가 있을 때보다 곁에 없을 때 조금 더 다정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놀랄 만큼 감동적인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 너무 벅찬 감동이라 깊은 숨을 쉬고 있을 때 뚝 끊고 엔딩 크레딧을 올리는 이 영화의 태도는 참 멋집니다. 2020년 가을, 정관조 감독은 이 영화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을 받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혼자 가서 상을 받은 후 정관조 감독은 주인공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서 음악회를 엽니다. 음악회 이름은 ‘지나온 길에 핀 꽃을 잊지 않으리’였습니다. 정관조 감독과 같은 마음으로 저도 글 제목을 그렇게 달아 보았습니다. 꼭 극장에서 함께 봐 주세요.(문의: 시네마달 02-337-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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