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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료원이 자꾸 외곽으로 가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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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 이야기_ 지역공공병원 만들기(6)

 

지방의료원이 자꾸 외곽으로 가는 까닭은

 

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저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공공성을 ‘공중 앞에 나타나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라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함께 이루는 공적 세계가 인간다운 삶의 절대적 조건이고, 사적 소유지와 구별되는 그 세계는 공공성을 가능한 한 폭넓게 지님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 된다.

아렌트가 제시하는 공공성 개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공공성을 공개나 개방보다는 비영리성, 비상업성, 공익성 등에 치우쳐 연관 짓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특히 의료 분야에서 두드러져 공공병원의 공공성을 주로 채산성이 낮은 응급의료, 중환자실, 감염병 진료에 관한 사회적 책임이나 빈곤층, 장애인 등 취약계층 진료에 대한 의무에 국한해 이해하곤 한다. 영리를 추구하는 시장 논리가 득세하는 우리나라 의료 환경에서 그나마 공공성 개념에 의지해 시민의 안전을 지키고 불평등 완화를 도모하는 것이지만, 적용 범주가 의료서비스 안에만 한정돼 좁다.

그러나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공공성이라는 아렌트의 말은 우리 눈을 넓게 열어 준다. 공공병원의 공공성이 일부 비수익 서비스를 책임지는 것으로 충족될 성질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뜨게 한다. 누구나 병원에 관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다시 말해 병원 정보를 시민에게 공개하게, 운영의 개방성을 포함하는 넓은 범주에서 공공성이 실현돼야 하는 것을 알게 한다. 조직 관리, 사업 관리, 병원에 대한 상급 관청의 감독 관리 등 중요한 정보가 공개돼 운영 실태를 시민이 투명하게 볼 수 있을 때, 현장의 소리가 시민에게 전달될 때 비로소 폭넓은 공공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공공병원이 사립 기관과는 달리 ‘시민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 된다.

정보가 공개되면 뒤따라 공론이 일어난다. 다양한 사람이 공론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각계각층에 두루 정보가 전달되는 데 있고 이는 정보를 제공하는 기관의 몫이다. 문서 게시, 자료 제공, 설명회, 소셜미디어에 전파 등 여러 수단을 활용해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아렌트는 관점과 시각이 다른 사람이 함께 공론장에 있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 통찰을 얻을 수 있으며, 사람들의 공론 활동을 통해 세계가 유지되고 새로워지며 지속된다고 보았다. 

 

공론화 없이 깜깜이로 정해지는 공공병원 이전 부지

시민의 알 권리는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인정되지 않았다. 수십 년의 군사독재를 청산한 민주화 뒤로도 공공기관 대부분에는 완고한 관료제가 그대로 남아 정보 공개는커녕 밀실 행정, 깜깜이 행정을 당연시했다.

깜깜이 행정의 해악을 공공병원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주로 이전 신축과 관계된다. 지방의료원 상당수가 2000년을 전후해 기존 위치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이에 관한 결정이 그저 ‘행정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시민 다수가 이용하는 시설이건만 이전할지, 한다면 어디로 이전할지를 정할 때 시민 의견을 모으거나 공론을 거치지 않았다. 관청 내부의 논리에 따라 또는 힘센 정치인의 요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예사였고 그렇게 정한 이전 부지는 한결같이 외딴곳에 있어 접근성이 나쁘다.

다른 어디보다도 진주의료원이 대표적 예다. 2002년에 경남도청이 이전을 결정했다. 당시 ‘김혁규 지사가 낙후한 서부지역 공공의료 서비스를 확대하겠다며 의료원 확장 이전을 약속했다’는 기사는, 이전하는 이유가 의료원 기능 강화나 환자의 접근성 증대가 아닌 지역 개발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 준다. 그 결과 2008년에 옮겨 간 곳은 진주 서쪽, 시가지가 끝나고 의령군으로 넘어가는 벌판 길가였다. 옛 의료원은 85년 동안 구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노선버스가 수십 개씩 다니는 중앙시장 앞 정류장에서 도보 4분이면 병원에 닿아 시민이 쉽게 이용할 수 있었으나 새 의료원은 구도심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노선버스는 30분 간격으로 다니는 1개뿐이었다.

2013년에 홍준표 지사가 ‘과도한 적자와 강성 노조’를 들먹이며 의료원 폐쇄를 발표한 뒤 국회 국정조사에서 ‘이전을 검토할 때 면밀한 입지 선정 과정이 부재했고 보건복지부가 사업 타당성 조사를 요구했음에도 경남도가 이를 무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주의료원 또한 비슷하다. 2000년에 제주도청이 기존 의료원 땅과 건물을 제주대학교에 팔았다. 제주대학교가 의대를 설립한 뒤 대학병원이 없어 곤란을 겪자 도청이 의료원을 넘겨준 것이었다. 대신에 새로 의료원을 지은 곳이 한라산 중턱,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천단 위쪽이다. 옛 의료원은 90년 동안 구도심 한가운데에 있어 노선버스가 수십 개씩 다니는 중앙로 정류장에서 도보 3분이면 닿았으나 새 의료원은 시가지를 벗어나 산길을 올라야 찾는다. 그런데 제주대학병원이 2009년에 더 넓은 땅으로 더 큰 건물을 지어 옮겨가 옛 의료원 건물이 용도를 잃었다. 그 뒤로 매각 당시에 도지사였던 우근민 씨가 선거에 출마해 의료원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공약을 냈다가 폐기하는 해프닝을 벌였고 최근에는 애초에 의료원 매각이 ‘심각하게 잘못된 결정’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뒤늦기는 하지만, 공적 중대사에 관해 시민 공론을 구하지 않고 권력층 내부에서 일사천리로 처리한 결과이니 불가피한 논란이다.

인천교 매립지에 있는 인천의료원 위치도 논란거리다. 1990년에 현대화를 명분으로 이전을 추진해 1992년에 첫 삽을 떴고 1997년에 옮겨 왔다. 매립지는 인천 일반산업단지, 주안 국가산업단지, 통일 공단 등 거대한 공업단지로 둘러싸인 좁고 길쭉한 땅이다. 면적 대부분을 산업용품 유통센터와 공구 상가가 차지한다. 보통의 도시 풍경은 전혀 없고 공장 지붕만 끝없이 펼쳐지는 중간에 마치 외딴섬처럼 의료원이 있다. 옛 의료원은 61년 동안 구도심인 중구 신흥동 큰 시장 건너에 있어 시민이 쉽게 이용했으나, 거기서 이곳 동구 송림동 공장지대로, 겨우 매립을 마친 황무지였던 곳으로 의료원을 옮겼다. 그 이유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당시 시민들은 정보를 행여 한 조각이라도 받아 보기나 했을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일에 실마리라 여겨지는 것은, 의료원을 이전하는 기간이 포함된 1988년에서 2000년까지 중구·동구를 합친 지역구에 여권 실세인 육군 출신 국회의원이 재임했다는 사실이다.

접근성이 나쁜 부지로 옮겨 가면 시민의 이용 빈도가 낮아져 병원 존립이 위태롭게 되기도 한다. 진주의료원이 생생한 예가 되겠다. 코로나19 대유행과 그 배경인 기후변화, 게다가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건강에 대한 위험이 커지는 지금, 깜깜이 밀실 행정이 공공병원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더는 허용할 수 없다.

 

공론장에서 통찰과 해법이 나온다

지방의료원은 시민이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공공병원이다. 2005년에 지방의료원법을 새로 만들 때 ‘소비자’ 자격으로 시민 1인을 이사에 포함하게 했고 그 뒤로 ‘지역주민 대표’ 등 시민 이사를 3인 이상으로 확대했다. 이는 사립병원에는 말할 것도 없고 국립중앙의료원이나 국립대학병원에도 없는 민주적인 지배구조다. 시민 이사가 활동하는 이사회는 정보가 시민에게 개방되게, 운영에 관한 중대사가 공론을 거쳐 결정되게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이에 대한 평가가 지금까지는 부정적이다. 이사들이 지자체장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이사회가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기도 하고, 시민 이사가 있다고 해도 시민이 공공의료의 주체라는 인식이 부족해 역할이 미약하다(건강정책학회, 2022 춘계학회 자료집). 아직 미완 단계의 지배구조인 셈이다.

 

2020년 7월 21일 열린 경남도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협의회’가 제2차 연석회의. 이 날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정책권고안’을 확정하고, 이를 김경수 경남도지사(당시)에게 전달했다.

 

최근 고무적인 것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2017년),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 공론화협의회(2020년) 사례다. 양쪽 모두 평범한 시민들이 자료를 학습하고 토론해 공동 합의에 도달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데서 통찰과 해법이 나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와 같은 공론화 경험이 공공병원의 운영 공공성 확대에 밑거름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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