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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해 살면서 주치의를 얻었어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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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해 살면서 주치의를 얻었어


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저자

 

올봄에 오랜 꿈을 이루었다. 전라북도 임실로 귀촌한 것이다. 내게 고향은 아니지만, 삼십여 년 전에 의사가 되어 첫 직장인 전주예수병원에서 일하던 때 인연을 맺고 언젠가는 들어가 살고 싶어 조그만 터를 장만해 두었다.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에 사는 걸 최고로 여긴다. 시골로 귀촌한다는 얘기에 관심이 별로 없을 뿐더러,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대개는 ‘그래도 서울 살기가 낫다’고 한다. 서울을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로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은, 부동산 가치에 대한 계산을 논외로 한다면, 단연 의료다. 나이 들어 무슨 병에 걸릴지 모르니 큰 병원 가까이에 살아야 안심이 된다며 ‘먼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고생이 많더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의문이다. 큰 병원은 중증 질환, 상태가 나빠진 환자를 주로 치료하는 곳인데 그런 병원이 노년기의 건강 유지에 과연 도움이 될까.

 

 

이런 게 주치의인가 싶더라고
 

8년 전에 완주군 산골 마을로 귀촌한 친구 부부가 있다. 남편은 문화와 관련된 일을 했고 아내는 대학 교직원으로 일하다 퇴직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고향이 아닌 그곳에 작은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들어가 텃밭을 가꾸며 산다. 내 귀촌을 축하하러 찾아온 부부에게 8년을 사는 동안 의료 문제로 애먹지 않았는지 묻자 대뜸 말했다.


“그런 건 안 살아 본 사람들이 하는 얘기야. 시골에는 외려 도시에 없는 게 있어.”
 

부부가 사는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옆으로 개울이 흐른다. 여기저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냇물과 작은 길이 거기서 만나는 지형이라 마을 규모가 제법 크고 초등학교와 보건진료소도 있다. 보건진료소는 우리나라 지역 보건 기관 중 가장 작은 단위인데 산간벽지 등 의료 취약지에 설치되는 ‘간이 보건소’라 할 수 있다. 간호사 면허를 가진 공무원이 근무하며 간단한 진료를 제공하고 질병 예방 활동을 한다. 주민들은 이웃집에 마실 가듯이 편하게 보건진료소를 드나들며 자기 건강이나 가족의 건강에 관해, 의료 이용에 관해 상담하고 정보를 얻는다. 


완주군 공식 블로그 갈무리.

 

친구 부부 역시 보건진료소를 자주 이용한다. 의사 없이 간호사 한 명만 있는 곳이라 진료 범위는 제한되지만, 가서 혈압을 재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근히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특별한 기억도 있었다. 
 

“일하다 다쳐서 전주 시내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꿰맸던 때야. 다음 날 소독하러 병원에 가기 전에 혈압을 재 보려고 보건진료소에 들렀지. 그런데 소장이 상처 부위를 들여다보더니 자기가 소독해 줄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매일 전주에 가는 대신 거기서 소독했어. 며칠 뒤에는 다 아물었다고 실밥도 뽑아 줬어. 진료비는 무조건 900원씩이고 말이야.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보건진료소뿐이 아니었다. 혈압약이 떨어지면 친구 남편은 마을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보건지소에 간다. 행정종합센터(면사무소)와 나란히 있는 보건지소는 산골 주민이 의사를 만나는 가장 가까운 장소다. 병역을 대신해 근무하는 공중보건의사가 있다.
 

몇 년 전에 그가 심한 두통과 신경 증세에 시달렸다. 시일이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자 전주로 가서 병원 진료를 받기로 마음먹고 어떤 병원, 무슨 진료과에 가면 좋을지 평소에 고혈압 진료를 해 주는 보건지소 의사에게 상담했다. 의사는 넉넉히 시간을 들여 환자의 이야기를 들었고 수면장애로 볼 수 있겠다는 의견과 함께 진료받을 병원, 진료과를 제안해 주었다. 막막한 마음으로 길을 나선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의사가 일러준 대로 병원을 찾아 진료받으며 어려운 고비를 순조롭게 넘겼다. 
 

“이때껏 살면서 진료실에서 의사와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어. 아마 환자가 별로 없는 시골 보건지소라서, 공무원 신분인 공중보건의사라서 그럴 수 있었을 거야. 이런 게 주치의인가 싶더라고. 나도 귀촌할 때 망설였는데 정말 잘한 일이야.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전속 간호사, 주치의를 어떻게 얻을 수 있었겠어? 아쉽게도 이번에 바뀐 의사는 지난번 의사와 영 딴판이기는 해. 그나저나 코로나 사태로 다들 파견 가 있는데 어서 돌아오면 좋겠어.”
 

공중보건의사 중에는 전문의 수련을 마친 이도 있고 의대를 갓 졸업한 이도 있어 사람마다 실력도, 열의도, 태도도 천차만별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의사가 영 미덥지 않다거나 대낮인데도 잠이 덜 깬 모습이더라는 등, 보건지소에 갔다가 실망한 이야기가 드물지 않다. 그러니 친구 남편이 실력 있고 성실하며 환자의 말을 경청하는 의사를 만난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느낀 대로, 그날의 좋은 상담은 의사 개인의 훌륭한 특성만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로 확보한 공공의료의 여건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을 공공의료
 

완주군의 친구 부부도 임실군의 나도 노년기에 접어들어 귀촌했다. 나이 60이 넘었으므로 분명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이 이미 80세를 넘겼고 마을에는 90세를 넘긴 할머니도 여럿 계시니 아직 노인 행세는 내 몫이 아니다. 할머니들은 팔다리에 힘이 없다 하면서도 텃밭을 가꾸고 이웃과 어울리며 활발하게 움직인다. 우리 세대가 그분들보다도 오래 살 가능성이 있는 걸 생각하면 내가 대비해야 할 시간의 길이가 얼마일지, 셈이 자꾸만 길어진다.


노년에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통계가 내놓는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2019년에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 진료에 쓰인 전체 비용이 86조 원인데 그중 65세 이상 노인 진료에 사용한 돈이 36조 원으로 전체의 42퍼센트나 되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 중 16퍼센트인 노인이 진료비 중에는 42퍼센트를 썼고 게다가 그 액수와 비율이 해마다 늘고 있어, 이대로라면 우리 미래는 어둡다. 노년은 길어진 수명을 병원에 다니느라 소모하는 우울한 시기가 될 뿐이다. 누구도 원하지 않을 이와 같은 미래에 대비하려면 기존과는 다른 방안이 있어야 한다.


희망은 있다. 앞서 소개한 친구 부부의 경험이 말해 주듯이, 우리 사회에 미약하게나마 이미 대안이 존재하는 것이다. 적어도 일부 지역에는 생활 반경 안에서 지역 공공 인력의 도움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질병을 예방하며 적절한 의료를 이용하는 체계가 있다. 비록 지금까지 이런 체계는 의료 취약지의 처지를 보여 주는 낙후한 것이라 여겨졌지만, 관점을 바꾸면 달라진다. 만약 그 체계를 친구 부부가 사는 산골 밖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어디서든 사람들이 쉽게 간호사나 의사와 상담할 수 있다면, 먼 거리를 나가지 않고도 의료인과 접촉할 수 있다면, 그 의료인이 공공 인력이어서 환자는 돈이 많든 적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건강할 수 있다. 노인 의료비도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료는 사립병원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상품처럼 거래되는데, 사실 이런 시장은 도시에나 적합하다. 시골처럼 넓은 면적에 적은 인구가 듬성듬성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데서는 사립병원이 사업을 벌일 만한 경제적 동기가 없어 시장이 형성되기 어렵고 있는 시장도 위축되기가 십상이다. 대신에 필요한 것은 공공의료다. 다행히 이를 위한 기초가 40여 년 전인 1980년부터 만들어졌다. 도시에 사립병원이 우후죽순 생기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던 때, 정부가 농어촌에 배치할 공중보건의사 제도를 도입하고 의료 취약지에 보건진료소를 만들며 마을 공공의료를 시작했다.


앞으로 이 공공의료가 확대되고 수준도 더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의사와 간호사를 확보할 새로운 제도 도입을 기대한다. 공직을 선택하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지면 공공의료가 발전할 동력이 생긴다. 산골 마을 주민만 얻을 수 있던 전속 간호사, 주치의가 있는 의료를 다른 지역에까지 퍼뜨려 적은 비용으로도 사람들을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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