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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억을 3년 동안 갚았다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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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온 소식

 

33억을 3년 동안 갚았다

 

김순희/ 전국금속노동조합 KEC지회 조합원

 

저는 구미에 있는 비메모리 반도체 제조회사인 KEC 노동자입니다.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회사와 함께해 왔는데요, 22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KEC는 노조 파괴로 악명 높은 사업장입니다. 새벽 2시 직장폐쇄를 하고 기숙사에 용역 깡패 600명을 투입해서 잠자던 여성 조합원을 밖으로 끌어내는 폭력을 저질렀지만 회사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라고 말하던 회사의 폭력에 참을 수 없어 파업에 참가했지만 사회에서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2010년 파업에 참가하면서 ‘회사에게 나는 뭐지?’ 생각했고,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정의란 무엇인지,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고민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보이지 않는, 알려지지 않은 이면들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 맞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참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2019년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반도 체 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KEC 주식은 크게 올랐습니다. 대표이사와 주주들은 수백억 원의 주식 차액을 챙기고 배당금을 받았습니다. 흑자에도 구미 공장에 대한 투자는 없습니다. 반도체가 잘나가게 될 걸 예상 못 했는지 회사는 오래전부터 구미 공장을 없애려고 준비해 왔습니다. 외주업체로 물량을 돌려 일이 없게 만들면서 인원은 줄어 갔습니다. 구미 공장에서 만들던 제품을 시장성 없다고 하더니 태국에 공장 을 지어 생산하고 있습니다. 

2021년 12월 8일 KEC 5공장 앞에서 신제품 전력반도체 외주화 중단을 촉구하며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KEC지회. 사진 제공_ KEC지회


임금도 동결되었습니다. 남녀 차별이 심각해서 여성은 30 년을 일했는데 최저시급을 받습니다. 낡은 설비와 줄어든 인원으로 두세 명 몫을 하며 일하는데 회사는 주말, 휴일, 명절 할 것 없이 일하라고 난리입니다. 휴일엔 못 한다고 하니 계약직을 채용했습니다. 인건비를 줄이려는 꼼수입니다. 반도체 제조는 정신적으로 신경 써서 해야 하는 작업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단기간에 배워서 마스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정규직으로 숙련되어야 합니다. 인원 충원 없이 기존 사원들의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가 커지고 있습니다. 쉬지도 못하고 일 한 노동의 이익은 모두 자본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어렵다며 제일 먼저 연차를 사용하라고 하고 무급휴직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려울 때는 노동자의 희생을 첫 번째로 강요하고 잘나갈 때는 휴일 없이 노동 강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회사의 탐욕은 끝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KEC지회는 반도체 호황으로 얻은 이익을 구미 공장 투자와 정규직 채용으로 나누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구미 공장 물량 축소 외주화에 반대하며 주말 특근을 거부하고 투쟁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줄어든 월급에 힘들지만 당장 눈앞의 돈보다 미래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의 정리해고를 막았고, 공장 유휴부지에 백화점, 오피스텔, 복합환승센터 등을 건설해 서비스업으로 탈바꿈한 후 부지를 팔아 우리 일자리를 없애려던 구조 고도화 계획도 시민 서명운동을 해서 막아 냈습니다.


2010년 파업으로 회사로부터 300억 원 손해배상을 청구받았습니다. 실제 손해라서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조를 괴롭히려고 손해를 부풀렸고 재판은 길어졌습니다. 법원은 33억 원으로 조정하고 노사 간 합의를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조정된 33억 원도 억울했지만 3년간 조합원 월급에서 공제 후 갚기로 합의했습니다. 합의하지 않으면 33억 원을 당장 갚아야 하는데 복리로 불어나는 이자에 원금까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조합원 개인에게 월급부터 집까지 압류한 후 사표를 쓰면 풀어 준다고 협박하며 조합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 감당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처음 변호사에게 손배 합의 조정안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 온몸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3년 안에 이 큰 금액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못 갚으면 어떻게 되지?’ 평생 만져 보지도 못 할 금액에 숨이 막혔습니다. 월급 전날 급여를 확인하는 소박한 즐거움은 사라지고 월급날은 답답함과 한숨이 두 배로 커지는 날이 되었습니다. 최저생계비를 제외하고 다 압류 되는 상황에서도 하루빨리 갚아야 한다며 빠짐없이 주말 특근까지 하는 조합원들, 지회 재정을 위해 매달 두 배 금액의 CMS를 납부하는 손배 비대상 조합원들까지 각자의 위치에 서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여름휴가와 명절 때는 손배 비대상 조합원들이 힘을 모아 손배 대상 조합원들에게 40만 원 씩 휴가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돈을 받는 것이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경제 적으로 느끼는 가난함에 힘들지만 가슴속 깊이 전해지는 그 고마운 마음이 한겨울같이 추운 3년을 견딜 수 있는 따뜻한 햇살 같아 힘든 시기를 잘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3년간 33억 원을 갚은 지회를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 거지?’ 하며 다들 대단하다고 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같은 아픔을 겪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이 웃고 아파하고 울 고, 뜻을 같이하는 우리는 가족입니다. 서로 각기 다른 성격과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힘든 시기를 한마음으로 지혜롭게 이겨내 왔습니다. 앞으로도 KEC지회는 외주화 반대, 고용안정을 위해 열심히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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