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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의 존엄사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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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의 존엄사

최성희

 

심각한 뇌출혈로 수술도 할 수 없는 시아버지를, 오늘이라도 곧 죽을 수 있다는 의사의 협박?에 굴복한 시누이. 의사가 마지막까지 존엄하게 모셔야 된다는 말에 동의한 시누이로 인해, 21, 중환자실에 시아버지는 들어갔다.

 

시아버지는 오랫동안 자식도 못 알아보시고, 기저귀를 차고 힘들게 요양원 생활을 버텼다. 중환자실에서 1주일 내, 사망할 수 있다는 시아버지는 다시 안정?을 찿아, 214일 공동간병인이 있는 6인실 병실로 옮겨졌다. 아버진 손목 결박을 당한 채, 위식도관으로 식사를 하고 소변줄을 달고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게 됐다.

 

나는 오래전 요양원 물리치료사로 근무했었다. 시아버지는 이제 뇌출혈이 아닌 감염증으로 인한 신장, , 심장 손상으로 고통을 받다 돌아가시게 됐다.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시아버지를 중환자실로 모시지 않고, 가족이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1인실 병실이나 임종실을 찾아야 했었다.

 

나는 22일부터 아버지 돌아가신 27일까지 계속 내가 임종을 지키고 싶다고 부탁했다. 남편은 자신과 누나가 할 수 없는 걸 나에게 시킬 수 없단다. 나는 소리쳤다. "내가! 나는 할 수 있다고! 내가 하고 싶다고! 시어머니라면 안 해! 그런데 시아버지는 아버지는 내게 달라!" 나는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나는 시아버지의 고통이 느껴졌다. 시아버지 살아오신 길을 아는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기암 오빠의 임종도 지켰고, 뇌출혈 어머니 간병도 했다. 시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고 싶었다.

 

작년 11월 말, 2번의 뇌출혈이 온 친정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2달의 간병기간 중 요양원 시어머니가 폐기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1월 말,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을 봐서 알겠지만, 요양원 부모님의 수술이나 중환자실 들어가는 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봐. 나는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해. 오빠가 누나와 이야기를 잘해봐. 긴급상황에서 자식된 입장으로 혼자 결단하기 힘드니까."

 

남편은 누나와 통화를 했고, 수술과 중환자실 모시는 건 안 하기로 했단다. 그랬다. 그 통화를 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내가 우려한 일이 생긴거다.

 

곧 돌아가실 시아버지를 살려낸 의사는 시아버지 퇴원을 이야기한 17일에 퇴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위식도관으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병원에서만 가능한 주사식이 아니면 아사(굶어 죽음)하게 된단다. 의사는 시누이에게 아버지가 2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덧붙여 평소 알츠하이머 외 다른 지병이 없고, 건강하셨기에 뇌출혈 후 이 만큼 견디는 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다른 약도 안 드시고 건강했었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시누이. "아버지께서 스스로 이 생의 끈을 놓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는 남편. 나는 그 둘을 다 용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 운운하는 의사 새끼. 그 새끼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겐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독한 약으로 신장기능이 망가져 사지는 부어오르고, 엉덩이는 물론, 심지어 후두부 욕창까지 생긴 이 모습을! 너희는 안 보이니?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된다고, 이런 고통스러운 상태가 된다고 말했잖아? 지금 병실에서 아버지를 보고도 어떻게 너희들은 이럴 수 있니?' 나는 미칠 것 같았다.

 

17, 나는 시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고, 부어오른 손을 잡고 오열했다. '아버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요앙원 안 보낸다는 거짓말을 제가 했어요. 지키지 못 한 약속 대신, 지금 아버지를 돌보고 싶지만, 제겐 권한이 없네요. 오늘이 마지막 인사가 될 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이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더 이상 뵐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의정부×병원은 요양원과 연계되어 노인 건보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다. 아버지와 내겐 최악의 병원. 21일 오전 6시 넘어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 227, 오전 634분 돌아가시고야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21일부터 병원 근처 모텔에서 아버지 임종을 기다리던 아들은 아버지 숨을 거둔 후 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6인실 공동간병인 병실에서 존엄?하게 홀로 이 생의 끈을 놓았다.

 

작은책 안건모 선생님과 3년 전에 인터뷰를 했다. 내 인생의 책은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나는 오랫동안 남편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에, 그와 어느정도 합의가 됐다고 생각했다. 시아버지의 존엄한?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남편을 착각하고 살았는지 알았다.

 

장례식은 시누이만 지인을 부르고 남편은 부르지 않았다. 남편은 축의금 없는 결혼식과 가족장에 대한 생각만은 확고했다. 거의 텅빈 장례식장에서 나는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 서로에게 한 지키지 못 한 약속에 대해.

 

*나는 말기암 친정오빠의 임종을 지키며, 현행 연명의료법의 한계를 경험했다. 국회에 계류중인 존엄사법이 통과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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