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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4) 내 아버지, 최세한 1탄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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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앨범엔, 아버지가 자신의 사진에 매직으로 쪽진 머리를 그린 할머니? 증명사진이 있다. 1941년생 아버지, 3살에 친모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할아버지가 전쟁 전에 부산에 내려와 사업을 하고 잘살았단다. 그런데 아들은 이북에 두고 데려 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겨우 데리고 왔지만, 그만 딸을 낳고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곧 아주 어린 여성과 결혼했고, 열 명의 자식을 더 낳았다. 그렇게 내 아버지, 최세한은 66녀의 장남이 됐다.

할아버지는 일본인이 두고 간 적산가옥을 인수해서 살 만큼 부유했지만, 아버지는 고아원 학교에 다니고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 번, 할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장남인데, 공부를 못하면 앞으로 동생들은 어떻게 돌봅니까? 공부를 하게 해 주세요.”

할아버지는 바로 아들의 뺨을 때렸다.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늦게 들어오는데, 할머니가 문을 바로 열어 주지 않으면, 잠든 어린 장남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잠들었냐며 말이다. 할아버지는 새 부인을 끔찍이 아끼면서, 큰 아들을 학대했다.

할아버지는 국책사업을 하면서 비리를 저질렀고, 감옥에도 갔다 왔다고 한다. 아버지 서른에 집이 폭삭 망했다. 이 스토리도 나름 재미있는데, 할아버지 장례식 이야기에 몰아 쓸 생각이다. 할아버지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고 인물도 좋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친일과 반공으로 돈을 참 많이 벌었던 나쁜 놈으로 추측한다.

아버지는 트럭조수로 일하면서 운전기술을 배웠다. 옛날 사람들이 그랬듯이, 정말 많이 맞으며 일을 배웠단다. 아버지는 평생 운전을 했다. 칠순이 넘어 은퇴를 할 때까지, 택시는 40년 넘게 운전했다. 아버지는 과학자나 판검사가 꿈이었다고 한다. 내 어릴 때, 아버지가 특허를 받은 팔리지 않은 제품이 집에 쌓여 있었다. 그 중 안경 코다리가 생각난다. 코와 안경의 접촉부위에 붙이는 면 스티커다. 코를 편하게 하는 제품이었는데, 나는 아버지만 오랫동안 사용한 기억을 한다. 우리 식구 중 안경은 아버지만 썼다.

나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자주 아팠고, 본인 입으로 얼마 못 산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폐 사진을 보면 폐가 완전 망가져 있다. 아버지 폐결핵을 오랫동안 치료한 선생님이 아버지의 건강검진 소견을 담당했다. 모르는 의사가 보면 아버지 폐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단다. 택시기사를 하면서 받아야 하는 정기적성검사에서, 아버지는 청록색맹인 눈과 폐로 인해 걱정을 많이 했다. 운전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또 할 수 있는 것이 운전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세대 다른 남자 어른들과 달랐다. 내복바람에 자다 일어나 눈을 비비며,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어린 삼남매 사진들이 많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오면서, 자식의 생일을 챙겼다. 가난한 형편에도 우리들을 위해 중고 미니피아노를 샀고, 현미경을 사줬다. 아버지는 정말 가정적이고 자식들을 아꼈다. 쉬는 날에는 회사 택시에 우리들을 태우고, 새로 생긴 터널을 구경하고, 박물관과 바닷가에 데리고 갔다.

아버지의 제일 큰 문제는 내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어머니께서 심한 두통으로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어머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이 오셔야 되겠습니다.” 의사가 어머니께 말했단다.

어떤 부인도 아버님을 만족시킬 수 없어요. 아버님은 천상에 계신 완벽한 어머니 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현실의 아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계모의 모습을 보는 거지요.”

아버지는 그랬다. 어머니와 정말 많이 싸웠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싸우다가, 잠든 자식까지 깨워서, 어린 애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내가 너희 어머니와 살 수가 없다는 등. 나는 초등학생까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실까봐, 부모님이 이혼을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고 머리가 커졌다. 부모님이 싸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며 오랫동안 반복된 질문을 또 했다.

두 사람, 이혼하세요. 아버지는 정신과 치료를 좀 받아야 해요. 어머니는 혼자 사세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잖아요? 우리들 때문에 산다고 하지 마세요. 이혼하세요.”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버지의 멍한 눈빛을, 정신적인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 그 눈빛을 기억한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는 것은, 내 말에 어머니가 두고두고 섭섭해 했다.

또 중학교 때다. 두 분이 싸우다 아버지가 화가 나 죽는다면 나갔다. 어머니가 오빠와 나에게 소리쳐 아버지를 잡으라고 했다. 오빠와 내가 아버지 차 뒷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우리보고 내리라고 소리를 빽 지르며 과속을 했다. 곧 멈춰서 같이 집에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아버지 잡으러 안 간다. 죽겠으면 혼자 죽으세요!’ 나는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봤기에 그렇게 미워하진 않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하게 본 어머니를 미워했다. ‘제발, 이혼 좀 하세요!’

내 나이 23살에 처음 자살을 생각했다. 해양대학교를 자퇴하고, 해운대 농협에 다닐 때다. 전날 퇴근했는데, 또 부모님이 싸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출을 했다. 다음날 출근길 육교 위에 섰다.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이 지긋한 싸움도 보지 않고 살겠지. 그리고 저 두 사람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겠지. 너희 때문에 내가 살 수가 없다며 한 참을 울며 서있었다.

그때를 최고점으로 부모님 싸움은 줄었다. 아버지는 성당에 다니면서 변했다. 천상의 성모님을 통해, 어머니 사랑을 간접 경험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결핍을 채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한 번씩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면, 내 인생은, 우리 가족 인생은 어떻게 됐을지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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