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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1) 우리 할매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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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력으로 19731010일 오전에 태어났다. 외할매가 산파였다. 할매를 통해 들은 내 삶의 첫 이야기는, 문밖에서 내 울음소리를 들은 아빠가 딸이네.”하고 나갔단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미역을 사러 갔다고 한다. 할매는 먼저 태어난 큰 손자가 아프니까 사위 눈치를 본 것 같다. 할매는 아들, 딸 차별을 절대 하지 않았다. 큰외삼촌이 딸만 둘을 낳아도, 아들 손주를 바라지 않았다. 할매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적어야지 결심하고 내 인생을 돌아보는데, 할매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내가 이만큼 인간노릇하고 살 수 있는 것은, 내 유년기에 받은 할매의 돌봄과 사랑덕분이다. 할매의 이름은 김인남, 나는 할매가 삐뚤빼뚤 할매의 이름을 적던 모습을 기억한다. 할매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한글이었다.

할매는 1916년에 태어나서 83년을 살다 가셨다. 17살에 4살 많은 할배와 결혼을 했다. 할배가 무서워 피해 다니다가, 결국 친정에 보내졌다. 친정아버지가 할매를 시댁에 다시 가라고 구박했단다. 나중에 아이 낳고 다시 찾은 친정에서, 더 있다 가라는 친정아버지보고 할매는 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가지 말라고 하냐고 큰소리쳤단다. 난 새색시 시절, 할매 이야기를 좋아했다. 26살 할매는, 우리 엄마를 낳을 때까지, 유산과 사산 그리고 유아사망으로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할매는 우리 엄마를 낳고 또 죽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새댁, 걱정하지 마오. 이 아이 귀를 보게. 이 아이는 바위에 떨어뜨려도 살 아이요. 걱정하지 말고 잘 키우소.” 할매가 찾아간 무당이 아기를 보고 말했단다. 무당의 말은 사실이다. 1942년생인 엄마는 칠순까지 설악산을 뛰어 다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할매는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엄마를 참 귀하게 키웠단다.

흥남부두에서 생에 첫 배를 타고, 거제도로 피난을 온 할매는 난민촌에서 3살 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다. 할매는 부산 당감동 달동네에서 딸과 아들 둘을 더 낳았다. 할배는 곧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아주 작은 집을 지었다. 달동네 무허가 집을 짓는데도 욕심껏 크게 짓고, 할배 땅을 침범하는 이가 있었지만, 할배는 가만히 뒀다고 한다. 그런 할배는 1981년 내가 흙벽을 빨아 먹었다던 그 작은 집에서 돌아가셨다. 내겐 할배의 기억은 별로 없다. 할배가 다가오면 도망친 기억만 있다. 우리 할배는 정말 순했단다. 그런데 나는 할배가 무서웠다.

옛날 당감동에는 화장막(화장터를 그렇게 불렀다.)이 있었다. 어릴 때, 검은 연기가 많이 나면 오늘은 사람이 많이 죽었네.’하고 생각했다. 할배의 죽음이 화장막을 생각나게 했다. 그런데 할배는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내 어릴 때는 화장하는 사람보다 입관해서 산에 묻는 것이 많았다. ‘화장막에는 누가 갔을까?’ 나는 딱 한 번 화장막 근처를 갔었다. 작은 관과 오열하는 아줌마를 봤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 나는 그 검은 연기를 보고 자랐다.

다시 할매와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내가 4살인가? 오빠가 외가 아궁이 부지갱이로 내 오른쪽 눈을 찔렀다. 놀란 할매가 내 눈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내가 눈을 꼭 감고 뜨지 않았다고 한다. 할매가 나를 업고 엄마가 있는 우리 집까지 30분을 달렸단다.

성희야, 차를 봐라. 성희야 저기를 봐라.” 당시 자동차가 귀했다. 차를 보라고 할매가 아무리 소리쳐도, 나는 눈을 꼭 감고 뜨지 않았다. 할매의 애간장이 녹았다.

성희야, 귤 먹어.”라는 엄마의 말과 동시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아무렇지도 않게 귤을 맛나게 먹었단다. 엄마는 내 눈을 살펴보고, 할매보고 괜찮다고 했다. 할매는 죽다 살았단다. 내 오른쪽 눈꺼풀 아래 검은 점이 있는데, 나는 이때의 상처라고 본다.

나는 오랫동안 할매의 찌찌()를 만지고 잤다. 나는 엄마 젖이 아닌, 할매의 젖을 먹고 컸다고 믿었다. 할매는 칠십이 넘어도 젖이 나왔다. 내게 엄마 같은 할매, 안타깝게도 나는 나를 업고 뛸 수 있었던 허리가 반듯한 할매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할매는 꼬부랑 할매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할매를 뒤에서 밀었다. 나는 꼬부랑 할매를 정말 좋아했는데, 소풍가는 날에는 할매가 부끄러웠다.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매 소풍을 할매 집 뒷산 선암사로 갔다. 전교생이 다 선암사로 갔다. 그 많은 아이들 속에서 할매는 나를 찾아, 집에서 삶은 계란을 챙겨줬다. 나는 할매도 계란봉지도 다 부끄러웠다. 지금은 할매가 나를 찾았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할매에게 나는 그 많은 아이들 속 빛나는 손녀였다.

할매는 우리 집에 한 달씩 사셨다. 이모 집은 오래 머물지 못 했다. 이모부가 너무 극진히 모셔서 부담스럽다고 했다. 할매는 우리 집 베란다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걸 좋아했다. 길에 백구가 지나가면 잡아서 큰외삼촌이 먹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매는 큰 아들 집에서 죽었다. 어머니는 할머니 돌아 가시 전 우리 집에 모시고 싶었지만, 할매는 장남의 집을 원했다.

어릴 때, 큰외삼촌과 어쩌다 둘만 냉면을 먹었다. 나는 집에 계신 할매의 냉면을 사가야 한다고 했다. 외삼촌은 남자가 음식 봉지를 들고 갈 수 없다며, 안 산다는 걸 내가 들고 간다고, 억지로 사게 했다. 외삼촌은 뒷짐을 지고 걷고, 나는 할매의 냉면 봉지를 들고 걸었다. 나는 할매의 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매는 다른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해도, 그 찔긴(요즘 냉면과 비교할 수 없다. 이북식 함흥 냉면은 진짜 질겼다.) 냉면은 드셨다. 할매 돌아가시고 몇 년 후, 동생과 속초 아바이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다가 할매 냉면 이야기를 했다. 둘이 냉면을 입에 물고 울었다.

울 할매, 냉면을 정말 좋아했지. 울 할매 보고 싶다. 흑흑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할매를 닮아 냉면을 좋아한다.

할매는 내 나이 28살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물리치료과 학생이었다. 졸업 후, 집 근처 병원에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할매 생각을 많이 했다. 학교마치고 내가 오길 기다리며 베란다에 앉아 있던 할매. 그 할매 손을 잡고 병원에 출근한다. 할매는 내 물리치료를 받고, 다른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놀다가 나와 같이 점심 먹는다. 그리고 둘이 손을 잡고 같이 퇴근하는 길을 나는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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