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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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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기다린다

  우리 집 밥상은 참 단순하다. 김치니 멸치볶음이니 하는 밑반찬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밥, 국이나 찌개가 하나, 과일 한 조각이 전부다. 이런 생활이 20년 넘게 이어졌지만 식구 중 누구도 상차림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일을 차렸다고 타박을 하거나 간혹 별식으로 전이나 나물류를 준비하면 먹을 것이 많아 헷갈린다고 불만이다. 때로 아들 녀석이 오늘 반찬은 뭐냐고 묻곤 하지만 특별히 요청하는 음식도 없다. 게다가 반찬이 적다고, 맛이 별로라고, 영양 균형이 안 맞는다고 불평도 없다. 주방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보다 더 편하긴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우리 집에서는 거의 한 사람이 요리뿐 아니라 모든 가사노동을 전담하고 있는데 바로 나다. 나는 보통 새벽 5~5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기상 시간이 각기 다른 가족들의 아침상을 때맞춰 준비하고, 어젯밤 널어놨던 빨래를 개고, 이부자리와 욕실을 정리하고, 아침 설거지를 하고... 헉헉. 끝이 아니다. 소화기관이 좋지 못해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곧 내 출근준비를 시작한다. 그렇다. 나는 직장일도 집안일도 해야 하는, 말 그대로 2인의 몫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가사노동분담이니 성평등이니 하는 말은 애당초 우리 집에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퇴근 후에도 옷만 갈아입으면 곧장 집안일에 뛰어들었고 잠들기 전까지 나를 위해 쏟을 수 있는 시간은 아예 없거나 기껏 1시간이 최대였다. 힘겹고 지쳤다. 집에 오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만 하고, 차려놓은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남편에게 너무 화가 나고 약이 올랐다. 남편에게 청소기라도 돌려달라고 부탁도 하고 악다구니를 쓰며 으르릉거리기도 했으나 심지 굳은 남편은 지금껏 꿈쩍을 않는다. 집이 지저분하면 지저분한 대로 살면 되고, 밥을 챙겨주지 않으면 안 먹으면 되는 사람이니 도저히 대적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집에 오면 인어왕자가 되어 말도 없으니 답답하기까지 하다.

  결국, 나도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집안일의 단순화! 청소기는 주 1~2회만 돌리고, 걸레질은 몸 상태가 좋을 때만 하고, 반찬은 국이나 찌개 하나, 그마저 힘들고 귀찮을 때는 반찬가게와 배달음식을 이용하면서 일의 양을 조절해 왔다. 이것도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될 때마다 힘에 부친다. 이제 대학생인 아이들이 자기방 청소도 하고, 설거지와 분리수거도 같이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해야 할 절대적인 일의 양은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다.

  남편은 귀가할 때, 간식거리를 잘 사온다. 간혹 뭐가 먹고 싶으니 사다달라고 하면 대부분 잊지 않고 챙겨오는 편이다. 거의 유일한 장점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라면이라도 끓여서 같이 먹자고 권하는 남편,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남편, 벗은 옷가지를 세탁실에 잘 옮겨놓는 남편. 그런 남편의 모습과 만나고 싶다.

 남자들은 나이 들수록 부인을 아끼고 존중한다는데 아직 우리 남편은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 그런 일반적인 사례가 우리 집에서도 나타날까? 내 건강이 악화되어 급기야 휴직까지 했지만 남편은 지금도 아주 당당하게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있다. 어쩜 당분간은 내가 집안일만 하면 되는 상황이니 남편은 더 느긋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는 없는데. 나는 지금도 집안을 건사하는 따뜻한 모습의 남편을 한없이 기대하고 있는데. “오늘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 줄게.” 하는 다정한 말 한 마디는 정녕 언제쯤 가능할까?

 

  • 작은책 안녕하세요. 안 그런 가정도 많지만 여전히 눈길 님과 비슷한 가정이 참 많습니다(사실 저희 집도 그래요 ㅎㅎㅎ) 그래서 더 공감하며 읽었어요. 일터에서 똑같이 힘들게 일하는데 왜 가정에서는 누구는 쉬고 누구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할까요? 솔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 2019-09-26 09:53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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