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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뒤편 갑질과 괴롭힘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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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뒤편 갑질과 괴롭힘

이산하

 


2015년 12월, 24살의 나이로 ubc울산방송에 입사했습니다. 기상캐스터, 뉴스 앵커, 취재기자, 라디오 DJ, 리포터, 영어 아나운서, 주말 당직, 아카데미 진행 등 거의 모든 방송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꿔 왔던 일이었고, 첫 직장이었기에 애정이 남달라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었습니다.
5년 넘게 주 7일 2시간짜리 데일리 라디오를 진행했고, 출입처는 따로 없었지만, 의료, 문화 분야를 담당해 리포트를 제작하는 취재 업무를 했습니다.

 

이산하 씨의 ubc울산방송 사원증. 사진 제공_ 이산하

 

취재 중에 교통사고가 난 적도 있었는데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휴가는 물론 산재 처리도 당연히 받지 못했고, 1년 가까이 병원 치료를 받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녔습니다.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오래 걷거나 높은 굽의 신발은 신지 못합니다. ‘산하 씨가 막내지?’ 한마디에 ubc 기자단 영어 아나운서를 맡아 4개월씩 3년을 주말 없이 일했습니다.

 

보도국장실에서 뉴스 오디션을 보고 아침 뉴스를 진행하게 됐을 때도 기상캐스터가 갑자기 뉴스 진행을 하면 어색하다며 강제로 1주일의 휴가를 쓰게 했고, 심지어 휴가 기간에도 뉴스 리허설을 해야 해서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울산에 태풍이 왔을 때는 회사에 기상캐스터가 없다는 이유로, 아침 뉴스 진행을 마치고 종일 준비를 해서 저녁 8시 뉴스에 출연해 태풍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하필 ‘방송의날’이어서 정규직들은 필수 인력을 제외하고는 출근을 안 하는 날이었습니다. 팀장은 아침 뉴스를 마치고 퇴근하려던 저를 붙잡고 인력이 없다며 본인이 해야 할 업무를 떠넘겼습니다. 전날도 하루 종일 풀 근무를 했지만, 팀장의 지시에 제보 전화를 직접 받고, 태풍 피해 리포트를 만들었습니다.

 

뉴스 앵커를 하면 급여를 더 많이 받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급여가 더 줄었고, 그 이유는 단순히 팀장의 착각이었다고 했습니다. 원래 말했던 대로 급여를 올려 달라고 말하자 그럴 수는 없고 대안으로 리포트를 하나씩 더 제작하라고 했습니다. 처음 말했던 급여와 금액을 맞춰 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대안 아닌 대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주 2회씩 리포트를 제작했고, 매일 12시간 이상 근무를 하고 주말까지 출근한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너 왜 아직도 집에 안 갔어?’였을 만큼 저는 ‘보도국의 노예’였습니다. 

 

회사의 지시나 필요에 따라 회사 직원처럼 일했지만, 그 대가는 해고였습니다. 2020년 11월 30일, 끔찍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혹시 결혼 계획은 있나?’, ‘(뉴스를 같이 진행하던) 기자 선배가 내려왔으니 같이 내려와야 그림이 좋다’, ‘뉴스를 안 하면 생활이 힘들지 않겠어?’ 이것이 해고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5년 넘게 진심을 다했던 회사를 떠나야 했던 이유조차 모릅니다.

 

그날 이후, 본격적인 팀장의 괴롭힘이 시작됐습니다. ‘프리랜서에게 업무 지시를 않겠다’, ‘누가 이산하 씨랑 친하냐’, ‘나는 말을 섞지 않겠다’, ‘품질이 떨어진다’라는 말을 들었고, ‘계속 방송을 할 거라면 주변에 알리지 마라’고도 했습니다. 5년여간 매주 해 왔던 취재 업무를 시키지 않았고, 업무 변경 사항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나운서 소개란에서 삭제하고, 주말 당직을 배제하려고도 했습니다.

 

팀장의 괴롭힘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건 또 다른 괴롭힘과 해고였습니다. 상무는 ‘딸 같아서 그렇다’고 퇴사를 종용했고, 재평가를 하겠다며 뜬금없이 ‘오독 개수를 세겠다’고 했습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 당시 평균 심박수가 140비피엠이었을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스튜디오에 있으면 벽이 좁혀지는 느낌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탈모 증상까지 생겼습니다. 결국 모든 방송사의 만능 무기, 개편을 이유로 2021년 4월 2일 해고를 당했고,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해고 통지서는 당연히 받지 못했습니다.

 

울산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근로자성을 인정해 원직 복직 명령을 내렸고, 7개월 만에 회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직 첫날, 가장 먼저 마주한 현실은 소지품 검사였습니다. 주머니까지 확인을 했고,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노동위 판정은 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네가 직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며 하루 4시간 단시간 근무에 계약기간을 1년으로 정하거나 적격성이 부족하면 계약 해지 등 독소조항이 담긴 차별 계약서를 제시했습니다. 또 제가 가진 능력이나 회사가 가진 기대치를 봤을 때 최저시급만 안 주면 된다고 했고, 이것이 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대우라고 했습니다.

 

ubc울산방송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대책위원회가 출범해 지난 3월 6일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ubc울산방송을 규탄했다. 사진 제공_ 이산하

 

2022년 12월,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 확정판결을 받고도 9년째 근로계약서는 단 한 장도 작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괴롭힘과 고립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회사는 지난해 9월, 라디오 뉴스를 폐지했고, 12월에는 하나 남았던 날씨 방송마저도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월 5일, 동의 없이 본래 업무와는 무관한 편집요원으로 일방적인 부당 인사 발령을 내려 퇴사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6시간 단시간 근무일 뿐만 아니라, 휴게 시간은 30분이라 다른 직원들과 함께 식사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3년 전, 해고를 당할 때와 마찬가지로 방송을 하지 못하는 명확한 이유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무늬만 프리랜서일 때는 정규직처럼 온갖 방송 업무를 다 시키더니 근로자로 인정받은 지금 오히려 ‘회사에 너의 자리는 없다’고만 말합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노동부에 진정을 넣어라’, ‘편집 교육을 받지 않으면, 인사위원회를 열어 또 해고할 수 있다’는 뻔뻔한 태도와 보복 갑질에 온전한 노동자성 인정을 위한 1인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6일,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ubc울산방송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울산 지역 언론 기자들에게 취재 요청 보도자료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기자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대형 방송사를 상대로 한 개인이 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실은, 생각보다 더 힘이 듭니다. 온갖 사회정의를 외치고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다루는 TV 뒤편에서 일어나는 갑질과 괴롭힘은 그 아무 곳에서도 다루어 주지 않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도, 경직된 방송 현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말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이상 좋아하는 방송 일을 하지 못할까 봐 참고 버티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송 비정규직들이 하나둘씩 근로자성을 인정받자 방송국에서는 또 꼼수를 부리고 있습니다. 방송 진행자의 경우, 프로그램별로 진행자를 뽑거나 1년 계약직, 운이 좋으면 2년 계약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만 해도 법원에서 근로자성을 인정받았지만, 정규직 근로자로 인정하기는커녕 법적 취지를 거스르고 ‘단시간 근로자도 근로자다’라는 억지 주장을 내세우며 부당 전보로 퇴사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다른 판례를 남기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산하 씨가 지난 1월 18일 UBC울산방송 사옥 앞에서 개최된 '부당전보 규탄, 온전한 노동자성 인정 요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공_ 이산하

 

목소리를 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방송국은 정의를 말하는 곳이고, 저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매일매일이 고통스럽고 끔찍하지만, 바른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 하나로 버티고 있습니다. 모두가 온전한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차별 없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일하는 곳은 공정과 정의를 외치는 방송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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