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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구석에 산다고 얕보지 마라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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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촌구석에 산다고 얕보지 마라

차남호/ 전북 완주 사는 농사꾼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생일잔치? 칠순 잔치? 이런 거 아니다. 면 단위, 아니 군 단위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크~은 잔치다. 돼지 1만 2천 마리를 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돈장을 막아 냈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오.

 

약칭 ‘이지반사’라고, 그 잔치가 끝날 즈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조직이 있다. 약칭을 풀면 ‘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 사람들’이 된다. 돼지농장이 들어선 전북 완주군 비봉면 봉산리 다섯 마을과 그 인근의 초중고 학부모회, 협동조합과 독서 모임 등 다양한 주민단체 30여 곳이 함께 꾸린 조직이다. 참여 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된 대표자 회의가 최고 의결기구인데, 마지막이 회의에서 축하 잔치와 함께 조직을 해산하기로 한 것이다. 조직을 꾸린 목적을 이루었으니 해산하는 게 마땅하고, 게다가 일이 잘 풀렸으니 잔치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2023년 9월 2일 열린 비봉돼지농장 완전해결 축하잔치. 사진 제공_ 차남호

 

들어선 지 30년 가까운 돼지농장, 그 사이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을 뿐, 하루에도 몇 톤씩 쏟아지는 돼지 똥 때문에 주민들은 ‘당최 살 수가 없었다’. 지독한 악취 때문에 한여름 찜통더위에도 창문을 열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농장 앞 하천에 분뇨를 무단 방류하니 파리가 들끓었고, 농업용수는 물론 지하수까지 오염됐다. 

 

그러던 어느 새벽, 분뇨를 하천에 무단 방류하는 현장이 적발되면서 행정 조치와 함께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양돈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폐업을 했고 가동이 중단된 농장은 그 얼마 뒤인 2015년 5월, 새로운 업체에 매각됐다. 농장을 인수한 업체가 바로 국내 굴지의 농축산 재벌 이지바이오 계열사였던 것. 그때부터 이 기나긴 싸움은 시작됐다.

 

비봉면 돼지농장. 사진 제공_ 차남호

 

농장을 인수한 업체는 곧바로 재가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20년 넘게 시달려 온 주민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돼지농장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은 주민들의 한결같은 뜻이었다. 업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낡은 시설을 개보수해 돼지를 치겠다며 완주군에 ‘가축사육업 허가 신청’을 제출했다. 2017년 여름이었다.

 

주민들은 이에 맞서 ‘이지반사’로 집결했고, 완주군청 방문과 집회를 이어 갔다. 숨이 턱턱 막히는 7~8월의 찜통더위 속에서 한 달에 걸친 천막농성을 벌였고, 여든 살 가까운 어르신들이 앞장섰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서울 강남 본사 항의 방문에 나섰다. 두 차례에 걸친 상경 투쟁에는 매번 1백 명 넘는 주민이 참여했다. 일흔을 훌쩍 넘긴 이지반사 여태권 상임대표는 ‘노구’를 이끌고 한 달에 걸쳐 노상 1인시위를 벌였다. “촌구석에 산다고 얕보지 마라”는 강력한 경고였던 셈이다.

 

전북 완주군 주민들은 돼지농장 재가동 불허를 요구하는 활동들을 했다. 사진 제공_ 차남호

 

그때까지도 완주군 주무 부서는 ‘관례’를 들어 허가를 내주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우리로서는 ‘인식 전환’을 위한 근거가 필요했다. 수소문 끝에 익산 장점마을 소송을 승리로 이끈 홍정훈 변호사를 만나면서 우리는 관례를 넘어서는 법률적 근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박성일 당시 군수는 홍 변호사의 설명에 공감했고 완주군은 얼마 뒤 업체에 ‘불허가’ 처분을 내렸다.

 

업체는 이에 불복해 ‘불허가 처분 취소 청구’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거기 더해 이지반사 지도부에 ‘업무방해’ 등을 이유로 한 형사고소, 그에 따른 1인당 3억 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했다. 충분히 예상됐던 ‘촌놈 겁 주기’였고 우리는 덤덤히 법률적 대응에 나섰다. 

핵심은 행정소송. 주민 대표 세 명이 ‘피고 보조 참가인’으로 재판에 참여했다. 담당 재판부는 ‘양돈장 현장검증’을 진행했고 피고 보조 참가인에게도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석명’을 요구했다. 우리는 지역 주민들이 겪은 고통의 실상과 농장 재가동의 부당성을 절절히 호소했다. 결국 홍정훈 변호사가 제시한 명쾌한 법리가 받아들여져 1심은 완주군-주민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전혀 뜻밖’이라는 게 지역사회의 대체적 반응이었다. 업체는 항소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도 주민의 손을 들어 줬다. 심지어 ‘주민의 환경권’을 적극 인정하는, 1심에 견주어 진일보한 판결이었다. ‘시골 변호사’가 국내 굴지의 대형 로펌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사건 초기부터 “법정투쟁이라는 소모적이고 적대적인 방식 대신 상생하는 길을 가자”고 업체 쪽에 호소해 왔다. ‘완주군이 적정한 가격에 농장 부지를 매입해 친환경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업체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1심과 2심에서 잇달아 패소한 후에야 매각 협상에 나섰고, 지난 6월 완주군과 농장 부지 매매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비봉돼지농장 완전해결 축하잔치에 참석해 소감을 말하고 있는 차남호 씨(오른쪽). 사진 제공_ 차남호

 

이것이 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둘러싼 업체와 주민 사이 분쟁의 전말이다. 8년에 걸친 싸움에 이겨서 정말 기쁘다. 그런데 왜 기쁜 것일까?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기적을 이루어서? 지독한 돼지 똥 냄새를 더는 맡지 않게 되어서? 주거 환경이 좋아지니 지역의 가치가 유지되어서?

 

난 그렇다. 싸우는 내내 공식 의제로 제기하지 못했던 것. 기후위기를 도지게 할 거대한 공장식 축산 기지 하나를 막아 낸 게 어디여? 이번 판례로 비슷한 경우의 축사를 미리 걸러 낼 수 있다는 게.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최소한 이 고장에서라도 고기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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