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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졌어요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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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미안해요, 졌어요

권동희/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

 

김 형, 오랜만입니다. 우리가 만난 지는 꽤 오래되었어도 이렇게 편지를 써 보기는 처음입니다. 김 형은 내가 우울하기 그지없는 산재 사건, 특히 자살 사건을 많이 해서 자주 걱정스레 얘기하곤 하지요. 그런 우울한 사건을 하다가 내 마음도 우울해질까 봐요. 사실 모든 산재 사건이 그렇지만 자살 사건은 내게 특히 더 큰 과제이자 시련이었지요. 큰 상처로 남은 소송 패배의 상처는 아직도 지울 수가 없어요.

 

자살 사건은 2005년에 처음 담당했어요. 대기업 증권회사 과장이 회사 지하 체력 단련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사건이었지요. 그때 유족 여러 명이 상담을 왔는데, 배우자는 제 얼굴만 슬프게 쳐다보았어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다행히 산재로 승인되었지만 그 슬픈 표정은 잊히지 않아요. 그리고 2007년 대구에 있는 중소병원 간호사가 상사의 괴롭힘과 5차례 인사이동 문제 등으로 자살했고, 가족이 산재를 신청했으나 불승인되어 소송을 담당했던 사건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우울증 등 정신 병력이 없으면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승인을 해 주지 않던 암울한 시절이었지요. 고인의 일기장을 수십 번 읽고 자살하려는 마음을 이해하려 했는데, 결국 대법원에서도 패소했어요.

그리고 그즈음 다시 자살 (시도) 사건의 소송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철도 기관사로 근무하다가 수차례 사상 사고 이후 자살을 시도했고, 그로 인해 무산소성 뇌손상 즉 식물인간이 된 노동자의 사건이었지요. 지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소송에 임했어요. 정신과 진료기록 감정에서도 우울증이 발병한 것으로 보아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았지만, 판사들은 반대였어요.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패소했고, 2011년 6월 대법원에 상고장과 상고이유서를 제출했고, 이후 2014년 10월 30일 선고기일이 잡혔지요. 3년 4개월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향적인 대법원 판결을 기대했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선고를 들으러 갔어요. 아, 그런데 주심 대법관 입에서는 “상고를 기각한다, 상고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딱 두 마디만 나오더군요. 그때 법원을 나와 재해자의 형에게 전화했어요. “미안해요, 졌어요.” 눈물이 나더군요. 조퇴해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잤어요. 정말 내 능력이 부족해서, 또다시 상처만을 남기게 될지 몰랐어요. 아직도 사건에 내 주관과 감정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지 의심스럽고, 또 한편 한심스러웠어요. 3년 4개월. 그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 단 두 마디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맑고 찬 가을 아침 서초동의 서늘한 공기가 너무 잔인했어요.

 

 

그리고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주요 사건(대법원 2014.10.30. 선고 2011두14692판결)으로 공표했고, 많은 언론에서 “7년이 지난 사상 사고로 인한 기관사 자살 시도, 업무상 재해 아니다.”라고 기사화되었지요. 곪아 터지려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기사들이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한겨레> 법조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이 사건에 다른 내막이 있을 것 같아서 취재하다가 결국 연락이 온 것이지요. 다행히 <한겨레>는 노동자의 처지에서 이 사건의 억울함을 기사화했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 당시 <한겨레> 기자에게서 대법원의 주요한 자살 판결문 5건을 입수해서, 1심부터 찬찬히 분석해 보았어요. 내가 가진 시각과 논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법원에서 인용해 줄 수 있는 수준과 한계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정리했고, 이를 <매일노동뉴스>에 기고도 했지요.

 

대법원 패소 판결을 받기 1년 전쯤 근로복지공단에서 또 다른 기관사가 자살 산재 불승인 처분을 받았어요. 그분도 기관사로 근무 중 두 차례의 사상 사고가 있었고, 그 후유증으로 십 년이 지나 남영역에서 투신자살한 슬픈 사건이었어요. 대법원 패소의 후유증이 너무 컸지만, 거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어요. 유족을 설득해서 소송을 해 보자고 했고, 다행히 서울행정법원에서 업무로 인한 자살임을 판정받았지요. 공단이 불복해 항소심에서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다행히 이겼고, 대법원에서 최종 업무상 재해로 확정되었어요.(대법원 2017. 3. 19. 선고 2016두62177판결)

 

솔직히 처음 자살 사건을 담당했을 때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어요. 아니 노동자가 처한 환경, 기업이라는 조직에서 어떤 스트레스로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어요. 우울증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듯이 자살은 노동자의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질병’이라는 관점이 부족했어요. 자살 사건이 어려운 까닭은 자살자의 마음과 행동, 유서, 남겨진 육성, 유품 등을 찾고, 듣고, 보고, 느끼는 데서 오는 슬픈 감정 때문만은 아니에요. 때론 그 고인의 목소리가 이른 새벽 저를 짓누르기도 했지만, 패배의 상처만큼 크지 않아요. 김 형이 걱정하는 대로 나에게도 우울증이 심하게 지나간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도 버티는 이유는 삶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노동자들이 ‘어쩔 수 없는 질병’으로 자살하는 이유가 그들 탓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제 또 다른 자살 산재 사건을 검토하고 준비해야 해요. 다음 만나는 날에는 우리들의 우정이 삶에서 빛나는 또 다른 추억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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