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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망구의 억지 주문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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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할망구의 억지 주문

조수형/ 시인. 가전제품 청소 노동자. 《마음을 쓰는 일, 몸을 쓰는 시》 저자

 

냉장고 청소 의뢰가 들어왔다.

“냉장고 청소 좀 하려는데 (가격이) 어떻게 하죠?”

“네, 냉장고는 양문형, 4문형이 요즘 많은데 어떤 종류죠?”

“양문형이에요.”

“네, 그럼 가격은 12만 원에서 16만 원 됩니다.”

“왜 가격이 차이가 나죠?”

“냉장고 안의 음식물을 저희가 빼고 넣고 하느냐, 냉장고 뒤의 기계실을 청소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납니다.”

“음식물 빼고 넣는 건 제가 할 테니까 기계실하고 냉장고를 청소해 주시면요?”

“그건 14만 원입니다.”

“음…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이틀 뒤 아내와 함께 고객 집으로 갔다. 그런데 냉장고를 보니 양문이 아닌 4문형이다. 거기다 음식물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온 시간이 아까웠다. 아내한테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물을 빼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물을 빼기 시작했다.

 

 

우리는 냉장고를 청소할 때 고열 스팀, 구연산 세척, 자외선 등 살균 처리를 세 번 한다. 그렇게 깨끗이 세척하는 동안 고객은 빼놓은 음식들 중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 못 먹을 음식을 골라낸다. 이때까지는 순조로웠다.

“자, 다 됐습니다.”

“이거 빼놓은 음식들도 치우고 가야죠!”

“무슨 말씀이세요? 폐기 음식 치우는 일은 견적에 없었잖아요. 이게 무슨 경웁니까?”

“아니, 내가 고작 당신들에게 그거 시키려고 불렀겠어요? 그럴 거면 나 혼자 하든지, 용역 부르면 9만 원이면 깨끗해지는데.”

“그럼 용역을 부르셨어야죠.”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돈을 받아 갈 테니. 일 다 해 놓고 수고한 대가를 내 성질만으로 날릴 수는 없었다. 이미 우리가 예상한 시간보다 두 시간이 더 지났다. 그분이 또 입을 연다.

“내가 생각해 보니까 수납이 2만 원이네? 빼는 건 내가 했으니까 만 원 줄게 좀 넣죠.”

어이가 없어서 머릿속에 욕이 맴돌았다. 음식물도 아내가 다 꺼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번엔 “내가 힘이 없어서 그래.” 하며 사정을 한다.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왕 버린 몸, 그래 하자. 뭣 같은 할망구지만 어쩔 수 있나.’ 울화가 치미는 마음으로 음식물을 넣고 있는데 할망구가 또 주문을 한다. 

“아니 그렇게 말고, 정리하는 거 있잖아. 그거 사용해서 넣어야지.”

“정리 수납이요? 견적에도 없고요. 그래서 수납 상자들도 없습니다. 그거, 다 견적 넣어서 주문받고 하는 일이에요. 제가 신도 아닌데 없는 걸 만들어서 해 드릴 수도 없고요. 아무리 우기셔도 어쩔 수 없어요. 아까 버리신 것도 그 양이면 십만 원 추가 분량이에요. 알기나 하세요?”

“아~ 미리 주문해야 한다 이거지? 근데 왜 주문할 때 얘길 안 했어?”

‘이런, 씨팔!’ 속으로 욕이 저절로 나왔다.

“음식물 치우신단 얘기가 없었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예쁘게나 넣어 놓고 가.”

우리는 잘 닦인 냉장고를 보면 바로 표가 나기 때문에 일한 보람을 느낀다. 대부분의 고객들도 깨끗이 닦인 냉장고를 보면 더없이 좋아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마치 미수금 때문에 끌려다니는 하청업자의 모습처럼 개운치가 않았다. 

 

일이 끝나고 화가 난 상태로 차에 올랐다. 아내가 나를 달랬다.

“수형 씨, 담배 하나 피우고 가. 개 같은 년. 마음 좀 가라앉히고 가자.”

“어휴, 미안해. 기름값이 아까워도 처음에 그만뒀어야 하는데, 요즘 일이 없다 보니 내가 공연한 일을 했어. 미안해. 수고했다.”

“에고, 수고야 당신이 더 많이 했지. 시원한 커피 사 올까?”

담배 한 개비에 캔 커피 하나 먹으면서 가슴속에서 타는 불을 껐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그래도 안 싸우고, 돈을 받아 무사히 나왔으니 다행이었다. 혹시나 다시 전화가 올까 봐 그 사람 핸드폰 번호를 스팸 처리했다. 

 

그러고 나서 한 2년쯤 지났다. 무심코 받은 전화에서 그 저승사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우리 집 와서 냉장고 청소한 적 있으시죠? 또 청소할 때가 된 거 같아서….”

헉! 숨이 콱 막혔다. 하지만 친절하게 거절해야 한다.

“지금 신청하시면 오래 기다리셔야 하는데요.”

“얼마나? 그리고, 왜 전화가 잘 안 돼?”

“아, 제가 요즘 일이 많아 일할 때 정신없어서 전화기를 꺼 놓거든요. 주문하시면 두 달 정도 걸려요.”

그랬더니 다른 데서 해야겠다고 한다. 휴, 다행이다. 전화를 끊은 뒤 그 집 전화번호도 스팸 처리했다. 

 

‘양심도 없나? 또 전화를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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