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읽기

모심기가 가장 쉬웠대요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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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모심기가 가장 쉬웠대요

안건모/ 변산공동체 일꾼 

 

변산공동체에 내려온 지 1년이 다 돼 간다. 시골살이 난생처음이다. 내려온 지 얼마 안 돼, 변산공동체를 맡고 있던 젊은이가 갑자기 독립해서 나간다고 해서 대표를 떠맡게 됐다. 내 나이 예순다섯 살, 작은책에서 은퇴하고 내려왔는데 대표를 맡게 되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도시에선 은퇴할 나이인데 이곳 시골에선 아직 젊은 축에 속한다.

그동안 여기 내려와서 정신없이 일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일거리가 보이면 손을 놀리는지 스스로도 이해 못 할 때가 있다. 식당 주방 가스레인지가 너무 낡아 녹이 슬어서 교체했다. 식수로 쓰고 있던 지하수를 수도로 바꿨고 화목보일러를 교체했다. 지하실에 전기 공사를 했고, 수돗가를 정비했고, 똥과 오줌이 섞이는 강당 화장실 두 곳을 생태 화장실로 바꿨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없어 욕실 두 곳을 전기온수기로 바꿨다. 여기저기 쓰레기가 많이 쌓여 있어 치우는 데 고생했다. 아직도 치울 곳이 많은데 다행히 젊은 부부가 손님으로 들어와 큰 도움이 된다. 

 

5월이 되면서 논농사가 시작됐다. 내년에 변산공동체를 나가는 명기가 올해까지 논농사를 책임진다고 했으니 나는 옆에서 도와주면서 배우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여기는 유기농으로 벼농사를 하는 농부들이 모여 ‘산들바다 공동체’에서 함께 공동 작업을 한다. 작업하는 것도 품앗이인데 모를 모판에 낙종하는 작업에 명기가 나갔다. 아직 나는 돌아가는 시스템을 잘 알지 못한다. 모종이 들어 있는 모판을 논에 깔고 그 뒤에 부직포를 덮는 작업도 처음 해 봤다. 모판을 깔기 전에 논바닥을 평평하게 하는 작업을 ‘왕판질’이라고 한다. 모든 게 처음이다. 

모를 심기 전에 논에 물을 받고 물이 잠긴 논을 트랙터로 로터리를 쳐야 한다고 했다. 로터리는 딱딱하고 뭉친 논밭을 굵은 프로펠러 같은 날이 여러 개 달린 기계로 갈아 부드럽게 만드는 일이다. 변산공동체가 짓는 논농사는 임대받은 것까지 합치면 37마지기 정도다.(우리 논은 22마지기 정도다. 그 많은 논을 로터리 치는 일이 쉽지 않다.) 

논은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데 논마다 다 이름을 붙였다. 마포리 종암에 있는 논은 ‘종암논’, 세모꼴로 생긴 논은 ‘삼각지논’, 드렁허리가 많은 논은 ‘드렁허리논’ 등이다.

 

지난 3월 12일, 일명 ‘종암논’을 트랙터로 로터리 치는 날이었다. 명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트랙터가 빠졌어요.” 종암논은 변산공동체에서 차로 15분 정도 가야 한다. 차를 몰고 가 보니 트랙터가 완전히 빠져 있다. 이 논은 수렁논이라 늘 이렇게 트랙터가 빠진다. 결국 동네에 아는 포클레인 기사를 불러 트랙터를 겨우 뺐다.

“안 샘, 저 다른 논에 급하게 갈 일 있어요. 이 논을 한번 로터리 쳐 보세요.”

헐, 트랙터 배운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수렁논을 로터리 치라고? 뭐, 한번 해 보지. 웬걸, 트랙터를 운전한 지 10분 만에 바퀴가 헛돈다. 논바닥이 파이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수렁에 빠진다. 도저히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포클레인 기사한테 전화를 걸어 사정사정했다. 한참만에 포클레인 기사가 오더니 투덜대면서 우리 트랙터에 줄을 걸어 겨우 빠져나왔다. 포클레인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트랙터가 수렁에서 나오니 포클레인 기사는 뒤도 안 돌아보고 포클레인을 끌고 논두렁 길로 나가 버린다. 

다시 트랙터를 움직이는데 또 바퀴가 헛돈다. 어어어! 이거 큰일이다. 바퀴가 점점 빠지고 있다. 저 사람 가는데 이게 빠지면 어떻게 하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지만 엔진 소리만 클 뿐 트랙터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포클레인 기사는 그걸 보고도 화가 났는지 그냥 가 버린다. 아, 이거 큰일이다. 좀 더 있으면 완전히 빠질 판이다. 한 번 더 해 보자. 다시 후진 기어를 넣고 액셀을 있는 대로 밟았다. 뒤로 조금 빠지는 듯한다. 다시 전진 기어를 넣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우웽! 소리가 나면서 겨우 빠져나온다. 휴, 식은땀이 난다. 올해 이 논을 많이 보수했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논바닥이 조금 마르면 다시 해야겠다. 결국 그날 논 로터리 치는 걸 포기해 버렸다.

 

트랙터가 논바닥 수렁에 빠졌다. 사진_ 안건모

 

5월 중순쯤, 그동안 트랙터가 빠졌던 종암논이 햇빛에 많이 말라 명기가 로터리를 한 번 쳤다. 그런데 모를 심을 무렵에 논에 물을 댄 뒤에 다시 로터리를 치고 그다음에 물로터리를 다시 쳐야 한단다. 물로터리가 뭘까? 논이 물에 완전히 잠길 정도가 됐을 때 치는 게 물로터리다. 그리고 또 있다. 물로터리를 치고 써레질을 해야 한단다. 써레질이란 모내기를 하기 바로 전에 논바닥을 평평하게 고르는 일이란다. 말만 들어서 알 수 없다. 한 번 보면 알겠지.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짐작만 하면서 알아듣는 척한다.

우리 논은 6월이나 돼야 모를 심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5월 30일로 정해졌다. 며칠 남지 않았다. 마음이 바빠졌다. 가뭄이 심해 논에 물이 없어, 써레질은커녕 물로터리도 안 치고 있었는데 걱정이다. 마음이 바쁜 명기가 5월 20일, 21일에 나보고 굴다리논(5마지기), 삼각지논(4마지기), 찔레논(3마지기)에 물로터리와 써레질을 해 달라고 했다. 어차피 내년에는 내가 할 일이니 올해 잘 배우자고 마음먹었다. 써레질을 다루는 조작법을 그날 배웠다.

 

5월 20일 굴다리논 써레질을 하러 갔다. 조작하는 법을 배우긴 배웠는데 잘되지 않는다. 어떡하나? 전에 공동체에 있던 춘호를 전화로 불렀다. “춘호야, 좀 도와주라.” 술을 안 먹었는지 금방 왔다. 춘호는 날마다 술을 먹는데 술만 안 먹으면 천하에 둘도 없는 ‘착한 농부’다. “아, 형 이렇게 해야 돼. 나와 봐요.” 춘호가 운전대에 앉아 써레질 시범을 보여 준다. 내가 해도 그만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잘되지 않는다. 어쨌든 많이 배웠다. 그날 굴다리논 써레질은 춘호가 거의 다 하다시피 했다.

다음 날 21일 토요일 아침, 트랙터를 몰고 삼각지논으로 갔다. 6마지기 논이다. 그날은 오후 4시에 ‘줌’으로 작은책 글쓰기 모임 하는 날이다. 적어도 3시까지는 일을 마쳐야 한다. 오늘은 혼자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다. 천천히, 배운 걸 기억해 가며 트랙터를 몰았다. 유튜브에 누군가가 써레질은 예술이라고 했다. 잘하는 사람이 하는 영상을 보면 정말 예술 하는 것 같다. 나는 완전 ‘노가다’ 하는 기분이었다. 이앙기가 들어가 모를 심으려면 논바닥을 고르고 평평하게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트랙터로 코너를 돌 때 바퀴 자국이 생기고 논바닥이 파이고 흙이 한쪽으로 몰리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써레질. 사진_ 안건모

 

정성을 다해 수도 없이 트랙터를 끌고 논을 돌았다. 논바닥이 고르게 되지 않고 튀어 올라 온 게 보여 다시 돌면 또 다른 곳이 높이 솟아 있다. 점심은 공동체 젊은 부부가 떡을 갖다줘서 요기를 했다. 돌고 돌다 보니 3시가 넘었다. 휴, 부족한 대로 이만 끝내자. 트랙터를 몰고 논을 빠져나왔다. 모를 심는 사람이 “뭐 이렇게 써레질을 했지? 누가 그랬어?” 해도 어쩔 수 없다. 운명에 맡기자. 

 

일주일 뒤 이웃에 사는 대봉 씨가 이앙기로 우리 논에 모를 심었다. 오전에 모를 이앙기로 옮겨 주는 일은 변산공동체 손님으로 있는 정기 씨가 맡았다. 오후에는 내가 그 일을 교대해줬다. 그런데 오전에 내가 써레질을 한 논에 모를 심었을 텐데 아무도 그 논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궁금했다. 물어볼까 말까. 오전에 대봉 씨와 같이 일했던 정기 씨한테 슬쩍 물었다. “내가 써레질을 한 삼각지논은 어떻대요?” 

“아, 그 논이요? 다른 논보다 모심기가 가장 쉬웠대요.” 

“정말이요? 에이 설마….” 

“정말이에요. 대봉 씨가 그러던데요.”

 

정기 씨는 진지한 사람이라 거짓말을 안 하고 남을 잘 믿는 사람인데 대봉 씨는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사람이다. 대체 누구 말이 맞을까. 

 

다음 날 모내기한 논에 물이 잘 들어오는지 보려고 한 바퀴 돌았다. 가뭄이 심해 논에 물이 많지 않았다. 나는 써레질한 부분이 궁금해 논마다 유심히 살폈다. 그중 내가 써레질한 삼각지논이 가장 궁금했다. 음, 중간에 논바닥이 좀 튀어나온 부분이 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은데? 써레질 별거 아니네! 흠, 역시 난 어디서나 적응을 잘하는군. 아무도 없는 논두렁에서 혼자 뿌듯해하면서 웃었다. 내년엔 더 잘할 수 있어! 우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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