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읽기

‘앵’ 다녀오겠습니다

월간 작은책

view : 1702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앵’ 다녀오겠습니다


김태은/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보험설계사지부 한화생명지회장

 

결혼하고 두 아이 출산 후 집에 있다가, 또래 신혼부부가 사는 옆집에 매일 아침 커피 마시러 갔다 그 집에 오는 설계사의 권유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 번 본 사람인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화를 해서 거절을 못 해 나왔다가, 밥 얻어먹고 선물을 받아 미안함에 교육만 받아 보기로 했다. 둘째가 돌을 지나 18개월이어서 일할 엄두가 안 났지만 해가 바뀌면 슬슬 일할 생각에 워밍업이라고 생각하고 교육만 받을 생각이었다. 그때가 IMF가 시작되던 1997년 여름이었다. 교육 동기가 60여 명이었는데, 거기서 반장으로 뽑혀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록을 10월에 했고 11월인가 IMF가 터졌다.

 

그 당시에는 영업이 개척 영업밖에 없어서 트레이너 선생님과 매일 사탕 봉지를 돌리며 설문지를 받았다. 첫 급여를 백만 원 받았다. 그 당시 기억에 사무 경리 월급이 80만 원 정도였으니, 열심히 하면 더 벌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6시에는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야 해서 오전 11시~오후 5시가 나의 활동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을 빼면 4시간 정도밖에 일할 시간이 없었다. 어린이집 비용이 둘 합해서 36만 원, 교통비, 점심값 떼면 집에 있는 것이 더 낫다며 살림이나 잘하라는 남편과 “올케, 하필이면 그런 데 나가?” 하는 시누이들의 말에 오기가 생겨 누가 이기나 보자고 이를 악물고 출근했다. 그런 각오로 시작한 일이라 자존심에 금가지 않게 오로지 일만 하였다.

2021년 10월 19일 김태은 지회장이 국회 앞에서 한화생명금융서비스 위법행위 조사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공_ 한화생명지회

 

그 당시 나는 20대 후반으로 상당히 젊은 나이였다. 개척지에서 만나는 고객은 두 가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하필 보험을 하느냐는 것과 열심히 산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남자의 마지막 직업은 택시, 여자는 보험설계사라는 인식이 강했다. 남편이 사고 쳤냐, 생활비를 안 주느냐, 별의별 소리를 다 들어 봤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회의가 들기도 했다. 왜 그런 편견으로 바라볼까. 지금도 드라마에 설계사가 나오면 민폐 끼치는 역할로 나온다. 이것이 바로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일 것이다. 민폐 끼치는 분들도 있겠지만 공중파에서 내보낼 때는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내보내야 할 것이다.

 

보험회사는 시책이라는 것이 있다. 백화점에서 얼마 이상 사면 사은품 주듯이, 계약을 얼마 이상 하면 주는 사은품이라 보면 된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서 고객에게 주고 계약을 유도한다. 하지만 이 시책도 날짜에 따라 다르다. 항상 매월 초에 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그래서 기관장들은 고객에게 사은품을 미리 주고 계약을 받아 오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불완전 판매가 종종 일어난다. 심지어는 한 건을 판매했을 때 나오는 수당을 알려 주기도 한다. 여기에 눈이 멀어 본인들 계약이 들어가기도 한다. 잘하는 설계사들, 소위 상위 그룹이 일하는 것을 벤치마킹하라고도 한다. ‘Give & take’라며 수당의 30퍼센트를 고객에게 돌려주라고도 했다. 그러니 보험료 대납은 당연시되기도 했고 그러지 않고 영업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었다. 
보험회사는 마감이라는 것이 있다. 매주 하는 마감, 그리고 한 달 수금 마감. 연체, 실효 계약 관리 또한 기관장 평가에 들어가기 때문에 고객이 못 내면 우리가 먼저 돌려 막는다. 수금도 그렇고, 신계약도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먼저 보험료 내 주고 이후에 받기도 하는데, 시간이 지나 고객이돈 없다고 못 준다 하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많은 설계사들이 자칫하면 신용 상태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총 5회 마감을 하면서 마감 때마다 기관장들은 팀장을 닦달한다. 어느 기관장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계약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영업 잘하는 기관장들이었다. 원하는 실적이 나오지 않으면 퇴근시키지도 않았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20년 전에는 흔한 일이었다. 아직도 간간히 이러한 곳이 있기는 하다.

 

나는 신입 때부터 불평등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는 활동 나가는데 기관장들은 그때부터 한가해진다. 우리가 나가면 기관장들은 점심 먹고 사우나 갔다가 우리가 복귀하는 시간이 되면 들어와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는 더위에도 추위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을 뛰면서 따뜻한 사무실에 있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어느 날인가 독감 예방접종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다. 배우자까지 실비(시중가의 절반 정도)만 내고 맞는다는 걸…. 우리도 실비 내고 맞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독감 예방접종이 과연 사무실에 있는 사람한테 필요할까, 현장 뛰는 사람한테 필요할까. 그때 드는 생각이 ‘앵벌이’였다. 웃으면서 사무실 나설 때 “‘앵’ 다녀오겠습니다.” 했지만 가슴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힘이 없으니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고 살아왔다.

2021년 12월 9일 천막농성 282일차, 성실교섭 촉구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합원들. 사진 제공_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작년에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것을 단톡방에서 알았다. 1월 1일에 우리에게 안내도 없이 하루아침에 환산월초를 인하했다. 환산월초란 보험료를 기초로 급여를 산정하기 위한 성적이다. 이것은 기관장들이 회사의 지시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일어난 상황이었고, 코로나로 1년을 힘겹게 버텨 온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 급여가 이미 3분의 1 정도로 줄어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계약, 수금을 할 때는 앞장서서 목소리 높였던 기관장들이 우리 급여가 야금야금 깎일 때는 회사에 단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까 자기들은 힘이 없다고 일관한다. 파리 목숨이라나? 코로나로 영업이 안 돼서 내 계약을 넣게 유도하면서, 그 돈도 어찌 만들어서 유지하는지 뻔히 보면서, 그로 인해 자신들의 급여도 받으면서, 그리 태연하게 받을 수 있었을까. 고통 분담이라면서 정작 현실 앞에서는 외면했던 그들이 철면피로 보였다. 그날부터 모든 것을 작파하고 이 사실을 알리러 뛰어다녔다. 노동조합으로 뭉쳐야 함을….

 

수개월 동안 피켓을 들면서 25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바보처럼 참고 살아온 것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가족들도 내 성격을 알기에 말리지는 못하지만 걱정하고 있다. 고객들은 내가 데모한다고 알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는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이 없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도 조합원들은 눈치 보기 급급하다. 회사가 제공하는 사무실에 있으니 정서상 기를 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당당해지고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화생명지회 조합원들이 2021년 12월 9일 63빌딩 주변도로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 제공_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이제 법적으로 보장된 단체교섭을 시작한다. 이제 한화생명 설계사들도 회사의 당당한 주인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자동입력방지 스팸방지를 위해 위쪽에 보이는 보안코드를 입력해주세요.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창닫기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