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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과 국회 담벼락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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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과 국회 담벼락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완전히 두 손 들었어! 국회가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 심의 기간을 2024년 5월 29일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다니까. 원래 2021년 11월 10일까지 논의했어야 했는데 그걸 21대 국회 마지막 날까지 연장한 거야. 실로 대단한 인간들의 놀라운 행태인데, 그들이 시민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시금 알게 해 주었어. 10만 명 넘는 시민이 청원했어. 한 달 전에 미류와 이종걸 두 활동가가 법 제정을 촉구하며 도보로 부산을 출발했어. 그 도정에 수많은 시민들이 동참했어. 그렇게 한 달 동안 걷고 또 걸어 마침내 국회에 당도한 날이었어. 다른 날도 아닌 그날, 보란 듯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국회의원 임기 마지막 날까지로 연장해 버린 거야.

 

 전광석화 같았어. 합의하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법의 제정을 요구하며 찾아간 시민들을 닭 쫓던 개 신세로 만들었어. 과문의 탓일 거야. 자기들을 찾아 천 리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응답했던 인간에 대해 여태껏 나는 들은 적이 없어. 국회의원도 인간이어야 하잖아. 근데 아닌 거야. 자기 집 강아지한테도 그렇게 대하지는 않을 거야. 루소였어. 영국인들은 5년에 단 하루, 투표일에만 자유롭다고 했지. 그 하루가 지났으니 그다음 하루가 오기까지 시민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무리 떠들어도 상관할 게 없다는 거지. 걷든지 기든지 무슨 대수냐는 거지. 애당초 국민의힘에는 작은 기대도 없었어. 그나마 기대했던 더불어민주당에도 시민은, 시민의 고통과 갈망은 그들의 머릿속에 없는 거야. 170석 넘는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서인가. 권력 유지, 기득권 유지로 꽉 차 있을 뿐인 거야. 더불어도 없고 민주도 없이….

 “차별금지법 필요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해나 곡해를 불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재명 후보의 말이야. 오해나 곡해를 불식하는 과정? 어떤 오해? 어떤 곡해? 차별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것뿐인데! 우리는 이미 14년의 세월을 흘려보냈어. 여론조사는 차별금지법에 국민의 3분의 2가 찬성한다고 말하고 있어. “모든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말인데 오늘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 우리는 국민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박근혜 정부를 끌어내렸어. 그런데 현 문재인 정권과 국회를 보면 대의제, 특히 선거법에 하자가 있어서 국민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정부와 국회를 선출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거야. 가령 추첨제로 국회의원을 선출한다고 가정하면, 여성이 50퍼센트, 비정규직이 30퍼센트를 차지할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국회보다 훨씬 민주적인 국회가 될 거야.

23년 전이었어. 프랑스 공론장은 하원에 발의된 PACS(시민연대계약) 법안 때문에 무척 시끄러웠어. <르몽드> 신문의 토론면은 연일 찬반 글로 채워졌지. 내 기억은 당시 이 법안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의견이 50 대 50으로 찬성, 반대가 팽팽했던 걸로 남아 있어. 사회적 합의? 그따위 말은 나올 계제가 아니었지. 실상 그런 말은 기회주의자들의 비겁한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는 거야.

내가 에티엔과 피에르라는 이름의 게이 커플의 사연을 만났던 것도 그때의 일이었어. 오랜 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에게 불행이 찾아왔어. 에티엔이 난치병에 걸린 거야. 피에르가 극진히 간호하는 동안 에티엔의 가족 중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기어이 에티엔이 세상을 떠나자, 피에르는 슬픔을 가누기도 전에 에티엔과 함께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어. 에티엔의 가족이 쫓아냈던 거야. PACS는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어.

우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당시 집권 사회당은 “낙태 자유화 이후 가장 위대한 개혁”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어. 당시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말이어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어. 그들에게 개혁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어. 특히나 수사나 관념에 머무는 게 아니었어. 낙태 자유화와 시민연대계약이 개혁이었고 위대한 개혁이었던 거야. 1년이 지난 뒤 프랑스 국민에게 실시 중인 PACS에 대한 의견을 물었어. 찬성 70 : 반대 30으로 나왔어. 1년 사이에 국민의 약 20퍼센트가 생각을 바꾼 거야. 그때 나는 국민의 의식을 형성하거나 바꾸는 데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만큼 법제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어.

그리고 2001년 네덜란드에서 동성혼이 합법화한 뒤에 벨기에,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하여, 종교세를 걷는 독일까지 서유럽 나라들이 그 뒤를 따랐어.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되었던 거야. 이미 소개했던 말인데 여기서 다시 거듭하는 걸 양해하기 바라. 나아가 나의 안타까움과 분노에 공감하기 바라. “19세기가 노예해방의 세기였고 20세기가 여성 참정권(보통선거권)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성소수자들이 해방되면서 시작되고 있다.”

이 글 처음에 두 손 완전히 들었다고 썼어. 하지만 그게 항복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는 우리 일상에서 좌절이나 냉소를 지워야 해. 그것은 민주주의자를 소비할 뿐 민주주의 성숙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야. 누구 말대로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자고! 우선 국회 담벼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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