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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또 보았다. 청년모임 마니또 비긴즈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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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많이 또 보았다. 청년모임 마니또 비긴즈

최한솔/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노무사

 

“노무사님, 애들이 어리고 철이 없어서 뭘 모르는데, 하나만 부탁하겠습니다. 애들 이것 좀 하지 않게 말해 주세요.”

교장선생님은 주먹을 움켜쥐고 팔뚝질을 보여 주었다. 슬며시 탁자에 놓여 있는 <조선일보>에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한 기사가 언뜻 보였다.

“이번에 학교 비정규직 파업한다는데 우리 학교만큼은 그런 일 절대 없습니다. 애들도 회사 가서 애먼 생각하지 않도록 잘 알려 주세요”

반복되는 우려와 당부 속에 학교 전담노무사로서 처음 만나게 될 현장실습생 친구들과의 만남이 10분째 늦어지고 있었다.

“제가 건강한 방법을 잘 알려 주겠습니다. 하하하하. 시간이 없으면 전달도 못 하겠는데요? 하하하.”
 

어색함과 당혹감을 뚫고 나오는 헛웃음을 던지며 자리를 떴다. 씁쓸했지만 고마움도 느꼈다.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특성화고 친구들, 현장실습생 친구들이 어떤 시선과 편견들 속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공부 안 했으니 냉혹한 현실을 당연히 인정해야 하는 아이들, 그것도 모르고 천방지축 철없는 어린애들. 그런 친구들이 현장실습제도를 통해 빠른 취업을 하게 되니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그나마 잘 먹고 잘 버텨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애정이겠거니 했다.


현장실습생 지원을 위해 한 학교를 노무사가 전담하는 학교 전담노무사. 우연히도 공업단지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 지역에서 가장 많은 현장실습생을 보내는 학교의 전담노무사 가 되었다. 하지만 전담노무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현장실습생은 노동법이 적용되는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훈련생이라고 했다. 노무사회도 교육청도 조심스럽게 회사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점검이나 단속이 아니라 지원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했다. 노무사로서 역할이 고민될 때 현장실습생 친구들을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현장실습에 나가기 전 강의 한 번, 선도기업 인정 또는 현장실습 지원 코칭 때 한 번.


그 소중한 두 번 중 한 번의 기회를 위해 학교를 찾았는데, 팔뚝질을 막아 달라는 부탁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초조해질 정도였다. 호언장담은 했지만 건강한 방법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애당초 팔뚝질을 위한 시간도 아니었다. 단지 일하며 만난 선배 노동자들이 만든 좋은이웃(일하는사람들의생활공제회 좋은이웃)을 통해 함께 모이고, 즐기고, 새로움을 만드는 경험 덕분에 자신 있었다. 노동조합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이면 얼마나 재미있고 든든한 일들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함께 모이는 것만으로 즐거운 일이 생기리라.


내 가방에는 설문지 60장이 들어 있었다. 무엇을 할지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서 준비한 몇 개의 질문과 연락처를 적을 수 있는 한 장짜리 신청서였다. 약속된 강의를 마치고 신청서를 돌렸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거 해 볼 사람, 뭐든 필요한 때가 있을 테니 연락하고 지낼 사람은 고민하지 말고 신청서 써!” 
“치킨 한번 먹자! 회사 안에서는 힘들면 힘들다 말하기 껄끄러운데 회사 밖에서 모여 치킨 한번 먹으면서 진짜 현장실습 어떤지 이야기해 봐야지.” 
“좋은이웃이라고, 선배 노동자들을 많이 알고 있어.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도움도 받으면 좋지 않겠어?” 
“뭘 할지 몰라. 그런데 진짜 하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돌덩이라도 던져 줘. 그걸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걸 제일 잘하거든.” 

주어진 기회 중 한 번. 최선을 다해 꼬셨다. 처음 만난 66명의 현장실습생 친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신청서를 작성 해 주었다. 
 

이후 50개 사업장의 현장실습 점검을 진행했고, 91명의 현장실습생을 만났다. 두 번째 만남, 형식적인 점검에 그칠 순 없었다. 짧은 점검에 긴 면담 시간이 이어졌다. 이때서야 알았다. 형식적으로 주어진 짧은 면담 기회가 현장실습생 친구들에게는 처음 여행하는 사막 속에 오아시스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만난 친구도, 두 번째 보는 친구들도 반가움으로 한층 더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표정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이후 계획된 치킨 모임의 초청까지 이어졌다. 
 

전담노무사 제도가 시작되던 해 1월, 올해는 무엇을 할까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회의가 거듭될 때, 함께 일하는 임윤수 부장이 청년 조직화, 특성화고 졸업생 이야기를 꺼냈다. 현장실습생 친구들의 죽음이 매년 줄을 이었고, 함께 일하는 문상흠 노무사님도 현장실습을 하다 괴롭힘에 옥상에서 뛰어내린 친구의 산재 사건을 맡고 있던 때였다. 임윤수 부장은 현장실습생 문제, 청년 문제에 접근을 해야 한다며 기어코 50만 원의 예산을 설득해 냈다. 그리고 이 50만 원이 소중한 마중물, 치킨값이 되어 주었다.


갈 길이 어둡고 추워 보일수록 혼자보다는 함께가 낫다. 센터의 임윤수 부장, 한지경 노무사, 좋은이웃의 이응록 팀장과 현장실습생 지원팀, 일명 현실TF가 꾸려졌다. 선배 노동자들이 열어 준 좋은이웃 공간에서 ‘치킨 모임’이 진행되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다. 현실TF와 현장실습생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회사에서 할 수 없었던 이야기, 일하며 느낀 고민들, 궁금한 것, ‘각자’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2020년 6월 스무살 MT를 통해 '마니또'라는 이름을 짓다. 사진 제공_ 좋은이웃 현실TF

 

월급은 어떻게 관리하면 되는지, 스무 살이 되면 먹고 싶은 술의 이야기, 여행과 데이트 코스 등등 친구들의 설렘과 걱정이 묻어 있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스무 살은 처음이 라’라는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졸업식에 꽃벽을 설치하고 졸업을 축하하며 함께 사진도 찍었다. 만난 지 3개월. ‘노무사님’, ‘선생님’ 하고 부르던 아이들이 나를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많이 또 보았다. 갑자기 놀 때 모이는 ‘갑자기 포차’, 함께 모여 맥주 먹으며 영화 보는 ‘넷플렉스’, 퇴근하고 회 먹는 ‘회 사 가는 날’, 코로나 덕분에 시작된 소규모 근황 토크 ‘삼삼오오 모임’, 대학이 아니라 취업을 선택해 경험하기 힘든 ‘MT’도 갔다. 그 자리에서 밤을 새우며 ‘마니또’라는 모임 이름도 정했다. 어느덧 모임지기도 뽑고, 모임을 함께 기획하기 시작했다. 매월 한 번, 두 번의 모임들이 모여 일 년 사이 34번 모임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많이 또 만나는 사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마니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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