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읽기

‘영화’와 ‘여성’이 만나 이룬 ‘작은 우주’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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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_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영화’와 ‘여성’이 만나 이룬 ‘작은 우주’ 

 

유동걸/ 영동일고 국어 교사. 《토론의 전사》, 《질문이 있는 교실》 저자

 

<작은책>의 독자님들은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실까? 책과 영화 중 무엇을 더 좋아하실까?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들뢰즈의 유명한 말도 있지만, 그래도 <작은책> 독자시니 ‘책’을 더 좋아하실라나? 이번에는 영화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래 영화 중 몇 편을 보셨는지 보고 싶다. 혹 이 영화들의 공통점을 찾아내실 수 있으신지?


<82년생 김지영>, <우리집>, <벌새>, <정직한 후보>, <69세>, <보희와 녹양>, <밤의 문이 열린다>, <내가 죽던 날>, <찬실이는 복도 많지>, <아워 바디>, <영주>, <남매의 여름밤>, <보건 교사 안은영>
 

아마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눈치채셨으리라! 한국 영화판에서 두각을 나타낸 여성 감독의 영화들이다.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되나 조심스럽다. 특정한 직업군 앞에 ‘여’, ‘여류’, ‘여성’ 등을 붙이는 관행이 비판받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실이니 부정은 말자. 일단 위 작품들의 감독은 모두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다.(젠더적으로는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이름난 여성 감독 하면 누구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20세기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 정도. 21세기 감독 가운데 임순례(<와이키키 브라더스>, <리틀 포레스트>)와 변영주(<낮은 목 소리>, <발레 교습소>, <화차>), 방은진(<용의자 X>, <집으로 가는 길>), 부지영(<시선 너머>, <카트>) 등을 꼽을 수 있으리라. 

 

앞서 언급한 열 세 편의 작품들이 지닌 또 하나의 공통점은 2019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극장을 통해 장편 극영화를 선보인 여성 감독들 작품이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유리천장’을 떠올려 본다. 유리천장을 뚫고 앞으로의 여성 영화계를 만들어 갈 감독들의 작품 세계를 작가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 책이 바로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이다.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을 한 편씩 소개하려다가 아예 영화감독들의 세계 자체를 다루자는 기획으로 변경했고, 그 덕에 책의 세계가 훨씬 넓고 깊고 풍요로워졌다. 영화 속 이미지, 대사, 서사, 캐릭터 그리고 주제의식. 영화 한 편 한 편이 다루는 무수한 문제의식들을 여기서 다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제목만 보아도 대략 짐작되는 영화들도 있다. 
 

<82년생 김지영>이야 워낙 유명해 두말이 필요 없고, <69세>는 주인공이 병원에서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긴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를 향한 일갈을 하는 이야기이고, <아워 바디>는 《말하는 몸》처럼 여성의 몸의 서사를 다룬다. 대다수 영화들이, 여성들이 살아온 시간과 관계에 기반한 사랑이나 인연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여성 영화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점이 새롭다.
 

영화판의 유리천장을 녹여 가는 여성 감독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저자의 친절한 목소리에 설득당하고, 깊고 따스한 안목에 공감한다. 수잔 손탁은 “해석에 반대한다”(<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감독 김초희 님은 이 책의 영문 제목을 타투해서 다닌다고 한다)며 있는 그대로의 작품 보기를 권했지만, 우리 같은 범인들은 보는 눈이 깊은 헤르메스(해석자, 전달자)들의 해석에서 새로운 눈을 뜬다. 
 

이 책의 미덕은 2부에도 있다. 한국 영화사를 직조해 온 여성들의 영화제작 과정이나 여성영화 운동, 평론과 해석 운동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에게 그리 흥미로운 부분은 아니지만, 영화계의 소우주에서 여성들이 거쳐 온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작지 않다. 
 

한 달에 책은 대여섯 권에서 열 권 정도 읽고 영화는 (넷플릭스나 왓차 포함) 스무 편 남짓 보는 내가 극장에서 직접 만난 영화는 <벌새>, <찬실이는 복도 많지>, <69세>, <내가 죽은 날>, <정직한 후보>, <82년생 김지영> 총 6편이다. 
 

솔직히 젠더 감수성이나 여성의 시선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이 영화들을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길들여진 남성적 고정관념이나 ‘서울, 남자, 아버지, 대졸, (어설픈) 지식 인’이라는 남성적 포지셔닝의 틀을 일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고마운 것은 ‘느리게, 섬세하게, 아프게, 길게, 따스하게’ 등으로 표출되는 감정, 정동의 에너지를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 감각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가능하다면 나머지 영화도 찾아보면서 여성 감독의 문제의식과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느껴 보고 배우고 싶다. 저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작은책> 독자님 들도 이 책과 함께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찾아서 그들이 그린 우주에 동참하는 환희를 맛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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