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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진료 정보는 내 것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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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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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 이야기

 

 

내 진료 정보는 내 것

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저자

 

 

  우리는 이른바 IT 강국이다.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한다. 스마트폰의 세계 판매량 1위도 한국 기업이 내놓은 제품이다. 초고속 인터넷이 전국에 깔려 일상에서 IT 이용도 활발하다. 온갖 정보가 온라인으로 오고 가고, 정부와 지자체가 수많은 공공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제공한다. 사람들은 관청에 갈 필요 없이 집에서 전입신고를 해치우고 아동수당을 신청하며 주민등록등본이나 학교생활기록부를 온라인으로 편하게 발급받는다. 전에는 은행에 가야만 하던 금융 업무도 이제 손바닥 안 온라인 뱅킹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IT 강국의 명성을 빛바래게 하는 의료 정보화

그러나 유독 의료 분야에서는 IT 강국의 면모가 빛을 잃는다. 우리나라 의료기관의 정보화 수준이 높다고 알려졌지만, 환자가 체감하는 현실은 기대와 다를 때가 많다. 환자들은 불편을 호소하고 심지어 병원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사실 병원 대부분은 정보화에 많은 공을 들인다. 전자 의무기록 체계를 도입하고 디지털 영상 검사 장비를 설치하며 데이터를 안전하게 보관할 저장소를 확보하는 등,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하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환자의 불만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갈등이 환자가 A병원에서 CTMRI를 찍었는데 진료 장소를 B병원으로 옮기자 그곳 의료진이 같은 영상을 다시 찍게 하는 데서 비롯된다. 의료진으로서는 다른 병원의 영상 정보를 볼 수 없거나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해 다시 찍게 하겠지만, 또한 우리나라 의료 관행에서는 병원이 바뀌었을 때 다시 검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보지만, 환자는 이를 납득하기 어렵다. 환자가 생각할 때 A병원에 보관된 영상 정보는 자신이 비용을 부담해 생산된 것이니 병원을 옮기더라도 이용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광범위한 온라인 활용이 일상인 지금, 의료기관 간 정보 단절의 관행을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다음으로 빈번한 갈등은 서류 발급과 관련된다. 자기가 받은 진료에 관한 서류인데, 다시 말해 환자 자신에게 당연히 제공돼야 할 정보인데, 병원에 요청하니 직접 와서 신청해야 발급된다라는 답변을 받는 데서 생기는 마찰이다. 최근 어느 기사에서 생생한 사례를 접했다. “처방전을 받았는데 질병 코드가 공란으로 남겨진 걸 뒤늦게 알았으니 코드를 넣어 재발급해 달라고 병원에 전화했더니 직접 와서 다시 진료받아야 발급된다는 답변을 받은 것이다. 의료법을 확인한 뒤 처방전에 질병 코드를 안 적어 주는 건 의료법 위반입니다. 보건소나 복지부에 신고해도 되나요?”라고 묻자 바로 발급해 줘서 온라인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될 일을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 길바닥에 시간을 버려 가며 병원에 오라 하니, 기사에 담긴 불만이 컸다.

이처럼 병원과 환자 사이 갈등의 배경에는 의료 정보화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이 있다. 병원은 진료와 검사에 관한 IT 환경 개선에 정보화의 초점을 둔다. 실행 과정에 업무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고 재정적 부담도 크지만,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맞추기 위해, 다른 병원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병원 내 정보화를 진행한다. 반면에 환자 편에서는 온라인을 통한 의료 정보 이용, 그중에도 자신의 진료 정보에 대한 권리 구현이 가장 중요하다. 병원의 내부 환경과는 별개로 환자가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를, 필요에 따라 정보를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두 관점 간 접근이나 조화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만, 지금 우리는 둘 사이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다. 해묵은 문제에 해결책이 단번에 나올 리 없지만, 나는 우리와 다른 이탈리아의 의료 정보화 현장을 소개해 해결책 마련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정보에 관한 환자의 권리

이탈리아 국영의료를 견학하며 가장 놀라웠던 것이 온라인 건강문서집(Fascicolo Sanitario Elettronico)이었다. 이는 개인별 디지털 정보 저장소인데 처방전 등 정보가 연도별, 분야별로 담겨 있다. 애초에 나는 그런 문서집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볼로냐에서 만난 의사들의 도움으로 알게 되어 담당 기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에밀리아로마냐 주정부의 의료 정보화 전문 공기업을 방문한 날. 건강문서집의 개발 책임자인 시모나를 만났다. 그에 따르면 에밀리아로마냐주 의료 정보화의 목적은 첫째, 의료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 국영의료에 대한 시민의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와 복지의 연결을 강화하는 데 있다. 둘째, 온라인 의료 네트워크를 개발해 의료인-행정-시민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게 하는 데 있다. 주내 일차의료 의사 4천 명과 전문의 1만 명이 온라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덕분에 가정의, 전문의, 외래진료센터, 병원, 약국, 가족상담실, 가정간호, 정신건강센터, 권역 국영의료본부 사이에 정보가 오고 간다. 여기서 생산된 결과물이 바로 건강문서집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처방전, 진료 보고서, 검사 결과 보고서 등 개인별 정보가 그 사람의 문서집에 모여든다.

에밀리아로마냐주는 450만 명의 인구 전체에 이 건강문서집을 제공한다. 누구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접속해 자신의 문서집을 언제든 열 수 있다. 실제 화면을 볼 수 있도록, 시모나가 자기 아이디로 접속해 주었다. 주정부의 건강문서집 웹사이트에 로그인하자 첫 화면이 열리고 의료, 처방전 등으로 구분된 항목 버튼이 나타났다.

의료 항목을 클릭하자 그가 지난 몇 년간 받았던 진료 보고서, 검사 결과 보고서의 제목이 발행 연월일에 따라 줄지어 나타났다. 무슨 종류인지, 발행한 기관이 어디인지를 제목만으로 간단히 알 수 있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니 암 검진 결과 보고서가 펼쳐졌다.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큼직한 글자체로 간략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처방전 항목을 클릭하자 몇 년간 그가 받은 처방전 목록이 발행 연월일에 따라 나타났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 질병명, 약 성분, 용량, 복용 방법 등 처방 내용이 적힌 것을 보았다. 이 외에도 화면의 오른쪽에는 온라인 서비스라 하여 본인부담금 지급, 진료 예약, 가정의 바꾸기, 승인 관리 등 메뉴가 따로 있었다.

놀라웠다. 이런 문서집이 있으면 환자의 진료 정보에 대한 권한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통상 의무기록은 병원의 통제 아래 보관되고 일종의 병원 자산으로 여겨져 환자의 접근이 차단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모든 의무기록은 환자의 진료에 따르는 생산물이며 환자에 관한, 환자의 정보다. 그런 만큼 이에 접근하고 이용할 권리가 환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온라인 건강문서집 제공을 통해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시민의 의료 이용을 도울 뿐 아니라 보편적 권리를 확장하는 성과도 거두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이 문서집은 자율적 건강관리를 돕는 도구가 된다. 자신의 건강 상태가 지금 어떠하며 그동안 어떻게 변화했는지, 다음번 정기검진이 언제로 예정되었는지 등을 참고해 건강관리를 할 수 있다. 만약에 갑작스레 다쳐 응급치료를 받게 되거나 여행지에서 몸이 아파 낯선 의사에게 진료받는 일이 생기면 문서집은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신의 건강 상태, 앓고 있는 질병명, 최근의 검사 결과, 복용하는 약 등을 의료진에게 손쉽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할 권리, 자기 진료에 대해 알 권리

온라인 건강문서집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 디지털 시대의 한복판에 있음을 실감했다. 의사로서 살아온 경력이 삼십 년을 넘었지만, 그동안 이런 서비스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언제 이런 것을 마련할까.

사람은 누구나 건강할 권리, 의료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 건강할 권리는 자기 건강에 대해 알 권리, 자기 진료에 대해 알 권리를 포함한다. IT 강국인 우리나라의 위상에 걸맞게 환자의 정보 이용 권리가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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