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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추석 보내기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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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올 해 추석은 비교적 연휴가 길었던 데다가 징검다리 휴일까지 겹쳐있어 남겨 두었던 여름휴가를 합치니 꽤 긴 시간을 놀 수 있었습니다. 9월18일부터 26일까지 총 9일간 이었는데 음식장만하고 넉넉하게 차례를 지낸다 해도 시간이 남아 그 동안 미뤄 두었던 남도여행의 마무리를 짓자는 생각으로 계획을 짰습니다.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아침부터 술이나 푸는 것이 그동안 해왔던 일과인지라 어머니도 집사람도 흔쾌히 그러라고 하시더군요.

9월 19일, 일요일 아침에 첫 여행지인 영암의 월출산으로 떠났습니다. 고3인 조카 녀석도 바람 좀 쐬겠다며 따라 나섰습니다.

월출산은 해발 809미터로 그리 높지도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면적이 가장 작은 국립공원이기는 하지만 나주·영암 벌판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위용이 사뭇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더구나 온통 화강암 바위덩이로 이루어 진 터라 무척 험하기까지 합니다. 요 몇 년간 산행을 거의 하지 못했기에 걱정부터 앞서기는 했으나 조카와 마누라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짐짓 씩씩한 척 걸음을 옮겼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에 계단을 만들어 길을 낸 턱에 끝없이 계속되는 오르막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나 중턱쯤에서부터 펼쳐지는 월출산의 기기묘묘한 모습은 그동안의 고생쯤은 한 순간에 날려 버릴 듯 보는 이의 감탄을 절로 만들더군요. 흔히들 월출산을 '호남의 금강산'이라고들 한다는데 과연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넓직한 정상에서 바라보는 강진만 바다와 나주 영암벌의 풍광 역시 가슴이 툭 터질 듯 시원합니다. 월출산에는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구름다리가 있어 명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옛적 월출산에 움직이는 바위 세 개가 있어 그 기운으로 산 아래 고을에 큰 인물이 난다고 하여 중국 사람들이 몰래 와서 바위를 밀어 떨어뜨렸는데 그 중 한 바위가 스스로 기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신령스러운 바위가 있다하여 고을의 이름이 영암(靈巖)이 되었고 월출산은 영암의 얼굴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도를 방문할 기회가 되신다면 영암 월출산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그날 저녁, 목포에서 큰아이의 학부모 세 집이 모였습니다. 명분은 월출산 완등을 축하한다는 것이었지만 내용은 역시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고 장어구이를 안주로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스치듯 추석을 지내고 지리산 둘레길을 한 번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술자리에서 하는 약속들이 대부분 흐지부지 되고 마는 터라 대충 그러자고 하면서 자리를 마쳤는데 웬걸! 이 양반들이 추석이 끝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는데 만나는 방법도 희한한 것이 톨게이트를 지난 곳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고속도로를 기어 올라와 차를 집어 타더군요.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하는 남도의 풍류(?)입니다.

어찌됐든 광주에서 남원으로 다시 '인월'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곳이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이고 안내센터가 있는 곳입니다. 명절이고 평일이라 한적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끝도 없이 밀려 들더군요. 줄을 지어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점심을 겸한 김밥을 주문하면서 물었더니 평소에도 많았지만 TV프로그램 '1박2일'이 방송된 후 더 많아 졌다고 합니다. 이번 여름 휴가지 중 최고로 꼽힌 곳이 경북 영주와 부석사인데 그 이유도 바로 '1박2일'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방송의 위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정권과 자본이 왜 그토록 방송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텔레비젼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둘레길은 주천-운봉, 운봉-인월, 인월-금계, 금계-동강. 동강-수철 등 몇 개의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인월-금계 구간을 걷기로 했는데 이는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총 19.3km의 코스로 '1박2일'의 강호동과 은지원이 걸었던 바로 그 길입니다. 다만 우리는 방향을 반대로 가는 것이었지요. 전라도와 경상도를 걸어서 지나는 셈입니다.

이미 이 구간이 가장 길고 가장 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각오는 하고 떠났지만 의외로 그리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월출산 산행의 여파로 느껴지던 근육통이 오히려 기분 좋을 정도로 농로길과 마을길, 임도 등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은 어릴 적 걷던 동네길의 정겨움이 뚝뚝 묻어 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윽고 산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완연한 산행입니다.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가늘게 실처럼 이어지는 둘레길은 흡사 지리산의 종주 능선길을 닮았습니다. 그러기를 세 시간 쯤 지나자 '장항마을'이 나왔고 거기서 준비해 온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쉬면서 안내도를 보니 앞으로 해발 6∼700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등구재'를 넘어야 하는 길이 만만치 않아 보여 집사람과 다리가 불편한 둘째는 차를 타고 먼저 가서 민박을 구하기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날 때 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쉼터에서 한 잔, 또 한 잔을 마시며 걷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더군요. 생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걷고 있는 둘레꾼들을 오히려 신기해 합니다. 도대체 뭐하러 이 먼 곳까지 와서 고생들이냐고 말이지요. 이윽고 도착한 '금계마을'.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과과 아이들이 흡사 개선장군을 맞듯 우리를 반겨 줍니다. 안방까지 내준 민박집에서는 저녁을 겸해 뼈까지 시커먼 '오골계'를 삶아 왔습니다. 지리산 천왕봉 위로 휘영청 밝은 달이 동그랗게 걸렸습니다. 금계마을 민박집 평상에 앉아 그 달을 안주 삼아 우리는 꿀 같은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인심에도 기분 좋게 취했고 말이지요.

이 곳, 인월-금계 구간에 '창원마을'이 있는데 2008년 11월 다른 일로 함양에 들렀다가 인근 지리산길을 걷기 위해 창원마을에 오셨던 노 전대통령이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고 가셨다고 합니다. 모두가 알고있던 것처럼 여전히 편한 복장과 말투로 반홍시를 맛나게 드셨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노 전대통령이 인사하고 가자 마을 어른이 "누고?(누구신가?)" 다른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하자 "하이고!", "세상에나!"를 연발하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꼭 다시 와 남은 길을 마저 걷겠다던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고 말입니다. 이런 사연을 미리 알고 갔더라면 산행길이 한층 더 의미 있었을 텐데 새삼 아쉬워 집니다.

다음날 금계-동강 한 구간을 더 걷자는 제안에 모두들 결사반대! 결국 '벽송사'까지만 갔다 오자는 합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전날 마신 막걸리 탓인지 세찬이와 저는 중간에 낙오하고 말았습니다. 여행중에는 되도록 과도한 음주는 삼가해야 겠습니다. 이 길은 과거 빨치산들이 몰살을 당했던 곳이라고도 하더군요.

먼저 내려와 일행을 기다리면서 무심히 보고 있자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둘레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의외로 여성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둘레길'이라는 명칭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리산을 오르는 산행이라면 조금은 부담스러워 망설였겠지만 산의 끝자락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이름이 여성분들을 둘레길로 이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제가 걸었던 이 구간에서 만큼은 그 희망이 여지없이 빗나간 듯 보입니다. 일반 산행의 80% 정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난이도 때문이지요. 앞으로 둘레길에 오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참고하시고 마음의 준비도 함께 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이상 저희 집 '추석 보내기' 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긴 시간을 시댁에서 불평없이 있어 준 집사람에게 고맙고 환대해 준 어머니와 형님 내외분들께도 고마울 뿐입니다. 자칫 형제들끼리도 삐걱거리기 쉬운 명절이지만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애써 준 덕택이겠지요.

명절이라고 후딱 갔다가 올라오기에 급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때면 왜 이렇게 먼 곳으로 이사를 와서 사람을 고생시키나하는 불만도 있었지요. 하지만 일부러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여행도 다니는 마당에 집처럼 편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달은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다 다르게 보이더군요. 집을 베이스 캠프 삼아 이곳 저곳 여행을 가 보는 것입니다. 전라남도의 전 지역이 이곳 무안에서 어디든 다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다녀와도 넉넉히 구경할 수 있습니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와 순천만, 우주발사기지가 있는 외나로도, 메타쉐콰이어와 떡갈비, 소쇄원으로 유명한 담양이며 운주사가 있는 화순, 다산의 숨결이 흠씬 묻어 있는 강진이며, 차밭으로 유명한 보성, 장흥, 고흥 등과 청정 한려수도국립공원까지 서울에서라면 힘든 여정이 될 곳곳을 마음 편히 둘러 볼 수 있습니다. 즐거운 명절을 보낼 수 있는 이유가 한가지 더 생긴 셈인데 살짝 마음만 바꿔 먹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연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새만금에 들렀습니다. 전북의 부안과 군산을 잇는 총 연장 33Km, 세계 최장의 방조제입니다. 간척 토지가 28,300ha라고 합니다. 그만큼의 갯벌이 또 사라진 셈이겠지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방조제가 이제는 지역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지역경제를 일으킬 특별한 동력이 부족했던 전북 현지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하는 것이 선대로부터 물려받고 후대에 전해줄 의무가 있는 현세의 우리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부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깊은 고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부치고 도라지 까고 설거지 하시느라 힘들게 일한 당신! 이제 떠나십시오! 즐겁고 행복한 명절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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