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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의 노인

고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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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의 노인 ..... 1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는 구명(救命)의 노인(勞人), 아홉 명의 신선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빛이 되어 천상에 올라간 아홉 명의 신선이 땅에 빛을 주려 했으나 신선의 부활을 방해하는 그들은 먹구름을 만들어 하늘에 띄워놓았다. 그래서 땅에는 빛이 사라졌다고 한다.

11월의 쌀쌀한 늦가을 날씨는 옷깃을 여미게 했다. 늦은 오전에 회사 면접을 보기 위해 가는 운광공단은 사방이 무미건조한 회색으로 가득했다. 운광 3공단 A단지에 있는 회사는 109번 버스정류장과 가까웠고 왼쪽으로 봉리가 전철역이 있었다.

이틀 전에 회사에 서류를 제출했다. 오늘 면접을 보기 위해 파라볼라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ㄷ자 형태의 3층 건물에 들어갔다.

1층 중앙에 있는 생산부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사무실에는 생산부 차장임을 자신의 직책을 자랑하는 듯한 백 차장과 총천연색의 짙은 물감칠을 한 이양이 있었다. 그리고 핏기가 가셔서 창백한 노란빛의 얼굴을 받치고 있는 하늘색 가운을 입은 송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송희의 손은, 흰빛의 가는 허리선처럼 곱게 뻗은 오른손 검지 끝마디가 새하얀 붕대로 두툼하게 감겨있었다.

, 이쪽으로 앉아요. 그리고 송희는 들어가 일해.”

입으로 달걀을 밀어 넣으며 백 차장은 달걀의 노른자와 함께 말을 뱉었다. 백 차장은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송희 씨, 이따 진통제 갖다줄게.”

사무실의 이양은 짙은 아이섀도로 흰자위가 전혀 보이지 않는 눈을 떠올리며 송희를 현장으로 떠밀어 넣고 있었다.

지철은 겹쳐오는 흑백과 컬러 얼굴을 대하며 이내,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송희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며 의자에 앉아 백 차장의 물음에 답했다.

전자공장과 봉제공장은 처음인가? 몇 살이지? 25살이면 곧 결혼도 해야겠군. 내일부터 출근하고 앞으로 열심히 해보라고. 그래, 내일 보자고.”

조금은 낯선 용어와 색다른 문화 환경을 접할 수 있는 곳. 지하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여는 순간 잔잔한 고전음악이 덜컹거리는 문소리에 섞이며 울려왔다. 좁은 공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좌석에는 이곳저곳에 듬성듬성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취직했다는 안도감에 한 달 라면값도 안 되는 일당을 생각하며 담배를 빼서 허공을 향해 가슴속의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을 토해냈다.

공단을 돌고 나서는 늘 이곳에서 콧속의 올챙이를 잡으며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던 이곳이 오늘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벽면에 장식된 모자이크와 동양화가 어울리게 이곳의 분위기는 낮에는 늘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래서 공장의 힘찬 기계 소리와 노동자들의 고통을 앗아가곤 했다.

그러나 저녁 퇴근 시간이면 공단 내의 노동자들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곤 해서 지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봉리가 오거리를 향해 버스의 탁한 매연으로 숨쉬기가 가뿐 상태로 걸어갔다. 혹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설렘을 간직하고 혼자만의 긴 외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차를 탈 생각도 없이 힘없이 걸었다. 2공단과 3공단을 가르는 전철길 옆으로 흐르는 하천의 먹물 같은 폐수를 내려다보면서 걷던 길이 오늘은 가슴이 후련함으로 흥분되었다.

얼굴은 붉은 노을처럼, 소주 몇 잔으로 인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지철은 한수와 5시에 공단 음악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수는 3공단 B 지역에 갔고 지철은 3공단 A 지역을 돌아보고 서로 알려주기로 했다.

1시에 공단 음악실로 들어설 때 둘은 자연스럽게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알고 처녀 가슴은 총각이 알듯이 그렇게 처음 만나 약속한 후 헤어졌다.

3공단 육교 밑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일 때, 지철은 이미 취직이 되었고 한수는 몇 군데 돌아보았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지철 씨, 그럼 내일부터 출근할 깁니까?”

글쎄요, 출근해야 할 것 같아요. 한수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니기미, 죽겠네. 지는 노가다나 다시 나가야겠어요. 돈이 너무 적어요. 저는 마누라와 자식이 있어서 노가다를 할 수밖에 없어요. 월급이 너무 적어요. 씹팔, 정말 좆같네.”

한수는 빈 술잔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11월 중순의 늦가을 날씨는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벌써 이렇게 추워지기 시작하는데 일이 있겠어요.”

알아봐야지요. 없으면 야방이라도 서야지요. , 어떻게 되겠지요. , 한잔합시다.”

취직이 돼도 걱정이네. 일당 4,200원이 뭡니까? 차비도 안 나오겠네. 한수 씨도 빨리 취직하기 바랍니다.”

지철은 손끝이 차가움을 느끼며 소주잔을 한수의 술잔에 갖다 댔다. 취기가 머리끝에 올랐을 때 지철은 공단 서점 앞에서 진열대의 책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초겨울 바람을 몰고 오는 109번 버스에 몸을 실은 지철은 취직이 되었다는 안도감과 내일 출근을 위해서는 일찍 집에 들어가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았다.

지철이 회사에 출근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점심을 먹고 나온 지철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솜의 잔털로 목이 꽉 메는 듯하여 가래침을 목으로부터 힘껏 내뱉는 찰나 이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여기 있었어요. 한참 찾았네, 차장님이 오시래요.”

가보세요.”

충전반 반장인 종구는 특유의 코 막힘 소리로 지철에게 어서 가보라고 다정하게 말을 했다.

3층 건물 한쪽 귀퉁이에 가건물 형태로 만들어 놓은 곳에 식당이 있었다. 충전반과 포장반은 식당으로 가는 출구가 같았다. 그러나 미싱반의 출구는 충전반과는 정반대 쪽에 있었기 때문에 지철은 점심을 가볍게 먹고 식당 옆에 서 있었다.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줄을 서기 시작하는 미싱사들을 눈여겨보고 있던 참이었다.

솜 창고를 통해서 생산부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려고 할 때 포장반과 충전반 사이에 나 있는 문으로 이양이 들어오고 있었다.

식사했나, 이리 와서 앉아요. 어때 일은 할 만한가?”

음 그래,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돈도 많이 모아서 결혼도 하고. ,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얘기하고. 이 군은 똑똑하니까 잘하리라 봐요. , 그만 가봐요. , 이양 주임이 언제 온다 했지?”

, 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답니다.”

창문으로 보이는 포장반에는 아줌마들과 아직은 소녀티가 얼굴 곳곳에 남아있는 어린 아가씨들이 앉아있었다. 웃음을 보내며 음악 소리를 높여달라고 이양에게 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등 뒤로 하고 지철은 생산부 사무실 문을 열고 현장으로 들어섰다.

생산부 사무실 앞의 충전반은 텅 비어있었다. 옆의 미싱반으로 눈길을 돌렸으나 미싱대만 길게 늘어져 시야에 들어오고 아가씨들은 한둘밖에 없었다.

식당 옆 화장실의 작은 공간에서 햇볕을 쬐는 충전반 반장 종구가 지철에게 손짓을 했다.

지철은 입에 문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종구에게 다가갔다.

일하기 힘들지요?”

아니, 힘들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앉아서 하니까 힘들 겁니다. 솜에서 나는 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해지지요.”

! 여기서 뭐 하냐? 운동장으로 배구 하러 가자. 지철 씨, 같이 갑시다.”

생김새가 원숭이 같은 용진이가 종구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지철은 종구의 손에 이끌려 운동장으로 나갔다. 좁은 운동장에서는 배구와 배드민턴을 하고 있었다.

앞서 달려나간 용진이는 벌써 미싱반 아가씨들과 배구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종구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지철은 한쪽 벽면에 기대어 선 채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힘찬 바람 소리를 내며 배드민턴 공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배구공도 까르르, 하하하, 웃음 따라 이리저리 튀어 오르고 있었다.

약간 낮은 정문 쪽에서 버스의 경적과 함께 서너 명의 아가씨들이 회사 마당으로 들어왔다. 손에 과자를 들고 입에는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었다. 몸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것을 지철은 무의식중에 바라보았다.

며칠 전 면접 때 사무실에서 본 송희도 있었다. 단발머리를 왼쪽으로 가지런히 넘기고 하얀 붕대가 감겨있는 오른쪽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옆에 있는 조금은 펑퍼짐해 보이는 아가씨와 팔짱을 했다. 다른 한 명은 조금 전에 현장에서 음악 소리를 높여달라고 몸짓해 보이던 동안의 소녀였다. 함께 걸어오는 무리 속에서 송희를 발견하고 지철은 낮은 흥분으로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따르릉, .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작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지철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작업장을 향해 돌아서는 찰라, 종구가 다가와서

점심시간 아직도 10분 더 남았어요, 10분 전에 미리 치지요.”

하며 지철이의 등을 잡았다.

종구 씨, 충전반에 새로 입사한 사람인가 보지?”

, 민숙 씨 혼자만 먹지 말고 나눠 먹읍시다.”

여기 있어요.”

언니 주지 마, 종구 오빠는 인형도 안 갖고 가고 꼭 우리만 시키니까 주면 안 돼!”

종구 씨, 순이에게 잘못 보였나 봐?”

송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하하, 사실은 제가 직접 갖다 주고 갖고 오잖아요.”

, 송희야! 순이야! 들어가자.”

민숙은 종구와 지철에게 과자를 주면서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철 씨, 우리도 들어갑시다.”

종구의 소리에 지철은 멀어져 가는 송희의 등을 바라보며 종구의 뒤를 쫓아갔다.

멀리서 용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같이 가자. , 성태야 공 갖고 와라.”

늦가을의 잿빛 하늘은 작업시간 종소리에 휩싸여 미싱 모터 소리에 말려 들어가 촘촘히 인형에 박히기 시작했다.

봉리가 전철역으로 오르는 계단은 전철을 타기 위해 가는 퇴근길의 인파로 인해 혼잡했다.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 송희는 오른손 검지 끝마디에서 아픔이 느껴왔다. 통증을 느끼 며 인파 속에서 손가락을 하늘로 향해 들은 채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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