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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야기(2) 내 어머니, 최정자 1탄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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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가 뭘 느꼈나봐. 평소에는 외가에서 잘 잤지. 그날따라 집에 간다며, 혼자 외가 동네 밖으로 나왔어. 우리가 집에 돌아온 다음 날, 미군들이 빨갱이 못 내려오게 한다며, 다리를 폭파시켰어. 정자(엄마 이름)가 외가에서 잤으면, 우리는 생이별했지.” 할머니는 전쟁 전 이야기를 하시면서 북에 두고 온 친정식구를 그리워했다. 아버지는 신의주 쪽이 고향이고, 어머니는 흥남이 고향이다. 어릴 때, 온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봤다. 어머니도 혹시나 모를 외가 친척을 찾고, 아버지도 친척을 찾았지만,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부산 선암사 아래 난민촌에 정착하고, 아픈 할머니 대신 어린 어머니는 막일을 많이 했다.

내가 아파서 나무를 하러 가지 못하니, 정자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나무를 하러 갔지. 그런데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이 애를 두고 온 거야. 혼자서 땔감을 가져오면서, 그 먼 길을. 나는 그때 생각하면 너무 속상해. 또 초등학교도 사납금을 못 내니 졸업장을 안 줘. 학교 나오고 바로 공장에 들어갔지. 내가 도시락을 사주면, 나 몰래 문밖에 두고 가는 거야. 집에 먹을 거 없는 걸아니까. 그것 때문에 많이 싸웠지. 네 엄마가 고생을 정말 많이 했어.” 할머니는 한 없이 딸에게 미안해했다. 내가 최정자, 내 어머니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한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점. 할머니 말씀과 다르게 정자씨는 공장 생활을 즐기며, 열심히 일했다.

내 친구와 같이 공장에서 멸치국수를 삶아 먹으면, 사람들이 놀렸어. 너네처럼 많이 먹는 애들을 누가 데리고 살지 참 걱정이 된다고 말이야. 그러면 우리들은 말했지. 우리같이 건강한 사람을 데리고 살 사람이 복이 많은 거야.” 어머니는 한 번씩 공장에서 국수 먹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공장 친구들과 홑겹 치마입고(사계절용 단벌) 편도 1시간 이상 걸어, 시내구경만 하고 돌아온 그 시간들이 좋았단다. 물론, 회사가 부도나고 체불임금 등 힘든 시간이 많았지만, 어머니는 오랜 공장 생활을 맛난 국수처럼 즐겁게 기억했다.

할머니는 가난한 자신의 딸과 결혼을 거부하고, 집안이 폭삭 망하고, 폐병으로 곧 죽을 사람으로 나타난 내 아버지 가족에 대해 말했다. 외가사람들은 너무 순했다. 반대로 친가 사람들은 정말 지독했다. 예를 들면, 삼촌 중 결혼을 6번 한 인간이 있는데, 친가 사람들은 모두 여자 잘못이란다. 나는 그 인간의 마지막 아내인, 숙모를 제일 불쌍한 여자로 본다. 8살인가, 명절에 결혼하고 시댁에 가지 않은 고모가 울 엄마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시부모에게 잘 해라고 말이다. 고모 말을 듣던 어린 나도 기가 찼지만, 암말 하지 않았다. 소통불가 집안이다.

내가 눈이 완전 멀었던 거지.” 어머니는 자기 좋다는 공무원을 두고, 병든 아버지를 선택한 자신을 원망했다. 나도 같이 어머니의 선택을 나무랐다. 오랫동안 아픈 남편의 엉덩이에 주사를 놓아주며 살았다. 내 아버지는 몸이 아픈 만큼, 정신적으로도 많이 아픈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네 할아버지가 나를 찾아와 돈을 좀 달라고 했지. 엄마가 와서 돈 달라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아버지까지 와서 결혼한 딸에게 돈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막 뭐라고 했지. 할아버지는 돈을 받지 못하고 욕만 받아 갔지. 그리고 얼마 후 돌아가셨어. 나는 그 날을 생각하면 너무 속상해.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때 내가 돈을 드렸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돈으로 제일 속상한 일을 이야기했다.

돈 이야기를 하니까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다. 내가 5살인가? 엄마가 처음으로 집을 나간 날? 쫓겨난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빚보증을 잘못 써, 그 돈을 갚아야 했다. 20년이 지나서, 그 보증을 썼던 집에서 어머니께 원금을 갚았다. 어머니는 원금 받은 일을 두고두고 자랑했다. 나와 아버지는 어머니가 또 다른 빚보증을 할까봐 오랫동안 걱정하며 살았다. 내 기억 상 마지막 빚보증 사건은 내 나이 28살에 생겼다. 벌써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이야기네. 어머니는 당신과 당신 자식들에게는 정말 엄격했는데, 남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돈을 잘 빌려줬다.

어머니가 빚보증했던 사람의 집을 우리가 인수했다. 우리라도 인수해야 그 사람이 덜 손해를 보고 부산을 떠날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하지 못하고 쩔쩔매던 그때, 어머니 옆에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빚잔치를 하고 떠나는 집의 늦둥이 아들이 7살이었다. 난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내 꿈에 나올 정도였다. 우리도 살던 집을 처분하고, 손해를 감수하고 인수한 그 집에 이사하는 날이었다. 어머니의 절친이 다른 절친과 하는 말을 들었다.

이 번에 이 집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이 많았지. 정자는 손해를 볼 사람이 아니지. 이 집을 인수했잖아. 똑똑해.” 나는 바보 정자가 너무 미웠다. 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하지 않았다. 한동안 엄마와 나는, 빚잔치를 하고 떠난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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