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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투고

호스피스 병원에 가다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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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5일 홍성 동생 집, 새벽 3시다. 또 잠이 오지 않는다. 어제 오빠에게 받은 폴더 폰의 문자를 확인했다. 주식은 최소 1년이 넘게 했고, 건보에서 건강검진을 해라는 문자도 있다. 운명이다. 오빠의 운명이다. 오빠는 어제 밤에, 최대한 빨리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봐 달라고 독촉 전화를 했다. 오늘 청주 호스피스 병원에 서류를 보내기로 했다.

토요일 양양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온다고 했다. 코로나 19로 가족 면회가 어렵지만, 오빠는 단국대 병원 경비 일을 했다. 그래서 직원들이 토요일 오후 외래환자가 없을 때, 가족면회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팔순 넘은 부모님이 오빠의 병실을 한 분씩 찾아 갈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다. 잘됐다. 그러나 부모님은 오빠 살아서 면회를 하지 못했다.

병실에 가니 새언니가 있다. 어제 분명 이번 주까지 일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모르겠다. 새언니가 아픈 오빠에게 왕솔이 노트북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정말 새언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언니 말을 막았다. 왕솔이 노트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학교에서 꼭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왕솔이 선생님과 소통을 하고 있단 말이야. 도대체 뭐하는 거야? 지금 쓰레기 봉투 안고 있는 오빠가 보이지 않아요?’ 속으로 화를 삼켰다. 나는 오빠를 돌보면서 새언니와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청주 호스피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바로 입원이 가능하다고 한다. 간호사에게 퇴원수속에 대해 물었다. 큰 병원은 퇴원하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진료비 계산이 늦어져 점심시간이 걸렸다. 오빠는 암 환자에다 직원 할인을 받아, 진료비가 250만 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진료비가 적은 이유는 항암을 받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나는 오백만 원 넘게 생각하다가 반값이라 굳이 긴급의료지원비를 받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처음에는 새언니와 같이 사설 구급차를 타고 청주에 가려고 했다. 시간이 늦어져, 새언니와는 병원에서 헤어지기는 걸로 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는 5시까지, 다시 천안에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새언니보고 오빠의 짐을 챙기라고 했다. 나중에 오빠가 사망하고 호스피스에서 오빠의 가방을 정리하면서 기겁을 했다. 치약이 5개 이상 나왔다.

퇴원하면서 오빠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오빠가 많이 힘들어 했다. 내가 간호사에게 부탁을 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도 또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내가 옷을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다. 오빠가 전직 경비 직원인 걸 감안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단국대 환자복을 청주 공항 쓰레기통에 버렸다. 제주까지 환자복을 가져가기 싫었다.

사설 구급차를 타기 위해, 오빠를 휠체어에 태워 이동했다. 오빠를 보고 오빠의 동료들이 내게 어느 병원을 가냐고 물었다. “청주에 있는 호스피스 병원을 갑니다.” 내가 말했다. 모두들 당황하면서도 오빠보고 힘내라고 했다.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는 뒤에 응급구조사와 같이 타고, 나는 운전자 옆에 앉았다. 새언니가 마지막까지 울며 서있는 모습을 뒤로하고, 우리는 청주로 갔다.

사설 구급차 기사는 보통 단국대 병원에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을 한단다. 청주 호스피스 병원 이동은 처음이라고 한다. 오빠와 나를 위해 기사는 안전하게 운전을 했다. 고마웠다. 눈물을 참으며 창밖을 본다. ‘시팔, 날씨가 너무 좋다. 이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이 아름다운 숲. 시팔. 이게 뭐야.’ 내 자리 앞 모니터로 오빠를 볼 수 있다. ‘오빠야!, 바보 오빠야!’

다행히 구급차 안에서 오빠는 구토를 하지 않았다. 호스피스 병원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보다 병원이 크고 환경이 좋았다. 병원 앞 도로를 지나 바로 숲이 있다. 코로나 19로 면회는 물론, 이동도 자유롭지 않아 산책로가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좋다. 오빠는 간단한 검사를 하고 나는 입원수속을 서류를 작성했다. 1층 수속을 끝내고, 2층 원장실로 안내받았다.

원장은 오빠에게 지금 불편한 것에 대해 물었다. 오빠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국대 병원 들어오기 전, 아팠던 상황에 대해 말한다. 오빠와 원장의 시간이 지나고, 오빠는 병실로 이동했다. 원장은 내게 오빠의 가족관계 질문을 했다. 아주 느리게 오빠의 이름과 가족들이 원장의 컴퓨터에 저장된다. 우리는 연명의료계획서까지 작성했다. 나는 연명의료를 원치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오빠가 살아 있는 동안 편하게 있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원장은 나이가 아주 많았다. 워드를 매우 느리게 쳤지만, 나는 원장이 맘에 들었다. 삶을 마무리 하는 사람들에게 딱 알맞은 의사로 보였다.

원장과 면담이 끝나고, 사회복지사와 간호사 면담이 있었다. 간호사는 임종 단계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 병원은 간병인이 상주하고 있어 병실에서는 가족이 없어도 되지만, 임종실로 옮기면 그때부터 가족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임종실에서 1주일 이상 머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임종을 지킨다고 했다. 간호사는 내게 간단 체크리스트를 준다. 임종 준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는 거다. 대체적으로 내가 다 아는 거다. 사람이 죽기 전에 나타나는 증상들에 대해서 말이다. 오빠 임종을 지키고 알았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님을 말이다.

마지막 사회복지사와 면담, 난 이 사회복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은 암환자는 보통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뜻의 말을 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내가 오빠를 욕하는 것은 괜찮아도, 다른 사람이 오빠의 삶을 탓하는 것이 듣기 싫었다. 사회복지사는 오빠의 생일을 물었는데, 가족이 챙기는 음력 생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았다. 오빠는 8월 생일인데, 내년 8, 이곳에서 생일잔치를 할 수 없다는 걸 그와 내가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호스피스에서는 오빠가 힘들게 구토를 하지 않아도 되게, 코로 튜브를 연결해 위액을 빠지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오빠는 아주 편해졌다. 오빠는 호스피스 병원에 만족했다. 오빠에게 왕솔이 스마트 폰을 주고,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게 했다. 단국대 병원에서 오빠는 새언니 앞에서 자신의 스마트 폰과 통장, 카드를 내게 줬다. 새언니에게 그리고 부모님에게 호스피스 병원에 잘 왔다고 영상통화를 했다. 구토를 하지 않으니, 말하는 것이 쉬웠다. 오빠 담당 간호사와 간병인에게 오빠를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의사와 간호사는 오빠가 오늘 밤에도 사망할 수 있다고 했다. 구급차 이동(장거리 이동)으로 환자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1층에서 오빠의 검사결과를 확인한 원장을 만났다. 오빠의 암이 곳곳에 전이가 됐다면서, 장례를 알아보라고 했다. ! 장례식.

나는 청주공항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왔다.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 품에서 한 참을 울었다. 앞으로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조카 일을 걱정하는 나에게 남편은 처음으로 속의 말을 털어놨다.

한두 달에 한 번은 동생을 꿈에서 만나. 그런데 동생 모습이 안 좋아.” 알콜 중독 시동생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3년 넘도록, 연락이 되지 않는 동생을 남편은 계속 꿈에서 만나고 있었던 거다. 나는 오빠에게 고마웠다. 오빠로 인해 남편이 내게 숨겼던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자신의 부모님과 누나, 동생을 책임졌던 남편에게 앞으로 처가식구를 책임지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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