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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의 대화는 서글프다

최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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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사물과의 대화는 서글프다

최창덕 / 배달 노동자

 

  옷가지를 뒤져 보니 유니폼이 8벌 나왔다. 동계용 점퍼 2벌, 솜바지 2벌, 하계용 상하의 각 2벌씩. 뭔놈에 욕심인지 무조건 쟁이고 보는 강박증인지. 올해 초, 회사가 직고용 라이더 업무를 폐지한 후 혹시나 다시 필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한벌한벌 챙겨놨던 녀석들이다. 비용증가다 적자다 매출부진이다 하며 입으로만 떠드는 회사에는 이가 갈렸지만 몽땅 버려지는 녀석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나...

  한창 일할 때는 애지중지했다. 도로 위가 일터다보니 기름때가 진득진득하기 이를때 없다. 수시로 박박 문데가며 손세탁한 작업복을 자주 갈아입었다. 동료들 한번에 나는 세네번은 기본이었다. 동계용 점퍼는 세제를 드음푸욱 넣고 일주일 정도 담가놔도 때가 점퍼와 이별하기를 극극 거부하기 다반사였다. 어찌저찌해서 땟물을 벗은 작업복은 정체불명의 자부심으로 작용했던지 하루종일 기분을 업시켰다.

  그런 작업복을 라이딩이 봉쇄당한 7개월 넘게 옷장에 감금했다가 슬슬 정리해서 사형집행할까 하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마주 보았다. 안쓰럽다. 이놈들이 왜 나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나! 이놈들아, 니들은 회사를 원망해야돼... 내가 아니라... 어쩌다 이 비극이...

  오랫동안 업무복귀를  적극 호소했지만 소 귀에 경읽기였다. 불통 아닌 소통과 통보 아닌 협의를 외치며 혼자서 외롭게 싸우고 있다. 여러 동료들은 작년 계약기간 만료와 함께 한 명 한 명씩 떠나갔다. 회사의 처분만을 바라볼 수 없었기에, 무기계약직이란 유일한 방어책을 무기 삼아 버티고 있다. 무기계약직은 무기로 사용한다고해서 무기계약직이다. 그래서 높이 들었다(무기여 영원하라!). 

  반응이 왔다. 최근에 회사도 칼을 빼들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던지 몇 일 전 내용증명서를 보내왔다. 인사명령 및 업무지시 불이행을 시정 촉구한단다. 징계위원회를 예정하니 각오하고(문맥의 강 속에 그런 의미가 도도히 흐른다) 회사말을 따르란다. 허억

  내용증명을 받아든 아침은 불쾌하게 시작됐다. 기분은 물먹은 폐박스마냥 흐물흐물. 증명서를 보낸다는 얘기는 미리 연락받았지만 막상 받아보니 두 눈이 용수철 튀듯 띠용. 고혈압 진단 후 매일 약을 복용하는 처지라 혈압에는 민감한 몸임에도. 냉정과 냉철과 냉혈(정말이다. 냉혈한 인간을 추구한다 나는)을 갈구하며 왠만하면 놀라지 않는 몸인데. 믿을 수 없는 정도로 심장이 뛰고 혈관이 불뚝불뚝 성을 내며 흐른다. 물론 골머리를 썩이며 몇 일간 밤잠을 설친 원인도 한 몫 거들었다.

  우산 들고 동네를 털레털레 걸었다. 마침 휴일이라 시간에 제약없이 골목골목과 뒷산 언저리를 방랑했다. 걸을수록 생각은 생각을 불러오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를 데려왔다. 금연 11년차에 담배가 땡기고, 바보들이나 마신다고 치부했던 소주에 흠뻑 취해볼까도 고민했다. `왕창 때려붇고 자빠져 잠이나 자볼까`

  그럴 수 없다!

  지금의 직장은 나에게 중요하다. 햄버거 프랜차이즈 매장의 배달 노동자. 거창한 자아실현도, 짭짤한 돈벌이도, 편안한 업무환경도... 그 무엇도 아니다. 오직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더할나위 없이 딱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도보 5분, 일주일에 이틀 근무, 4대 보험, 조금 벌어 조금 쓰자(개똥신조다), 맛있는 식사(맛있다, 두말 필요없다, 개인적으로 사먹기에는 많이 비싸지만). 그래서 6년 6개월을 버텼다. 작업중지권이란 은근 맘에 드는 신설법안이 없었을 때 억수로 내리꽂는 빗줄기에도 아마무시한 매니저의 눈치로 인해 찍소리 않고 일했었다. 천연 서울스키장이 개장하는 폭설 다음날도 양다리를 보조바퀴 삼아 배달하며 군소리 하지 않았다. 투덜투덜 불만을 토해내기 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만고의 불변을 믿고 묵묵히 일했다. 2년 지나 무기계약직이 되고, 근무매장도 본사도 타업체에 비해 성장세가 뚜렷해 장기간 안심하며 일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왠걸! 폐지가 결정됐습니다. 계약연장은 없구요. 종료와 동시에 무기계약직은 보직변경을 해야 합니다. 대안은 없습니다. 끝!!!

  끝이라고! 누가 끝을 정하나! 끝 아니다. 끝 날 때까지 끝 난건 아니다. 끝은 내가 정한다. 나의 직장생명에서 인공호흡기를 뗄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나는 직장생명 포기각서에 서명한 적이 없다. 심지어 쪼그라드는 회사라면 어느정도 수긍할... 아니다. 말조심하자! 어느 대규모 업체는 적자가 산더미임에도 노동자들은 각종 노동탄압에 맞서 당당히 저항하고 있다. 고쳐야겠다. 충분한 자료와 진실된 설명으로 직장의 위기가 명실상부하더라도 순순히 물러설 수 없는게 현실이다. 시간제 노동자의 현재이다. 하물며 허우대 멀쩡하고 얼굴의 땟깔도 나날이 훤해지는 회사에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니... 이거야발로 부조리다.

  무거운 머리를 이고 산책에서 돌아왔다.

  냉동실에서 햄버거를 꺼낸다. 매장에서 몇 일 전 가져왔는데, 전자렌지에 돌리고 녹차를 준비한다. 참 맛있다. *** 햄버거는 무엇과도 찰떡궁합이다. 몇 일 지난 냉동 햄버거여도 맛은 최강! 절대지존! 범접불가! 아... 이런 직장 사랑이라니... 그냥 햄버거 사랑인가... 암튼 나는 뼈 속까지 *** 라이더인 듯하다. 어찌 이런 직장을 떠날 수 있겠나!

  저항하자!

  아직 정리할 때가 아니다. 버릴 때가 아니다.

  작업복을 보고 넋두리한다(나이들수록 사물과 대화하는 햇수가 늘고있다. 서글프다).

  너를 절대 그냥 보내지는 않을께...

  • 작은책 안녕하세요 최창덕 님. 솔직하면서 생생한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별도로 연락드리겠습니다. 2020-08-07 09:55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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