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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

차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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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혁 010-3750-4542,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 670 402호


포장마차 (차재혁)

 

고등학교 1학년 말이던가. 내가 처음 술을 배운 곳이 포장마차다. 기억 속에 정확히 자리 잡고 있진 않지만 그 이전에라도 맥주 한 모금 정도야 안했겠냐마는 주종에 상관없이 한 병 이상을 제대로 된 안주거리를 앞에 두고 마신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던 시절, 술 영역에서는 이미 앞서나가고 있는 놈들 몇몇을 앞장세워 무슨 의식이라도 치루 듯 각자 소주 한 병 씩을 앞에 두고 마시기 시작했다. 한 번의 건배에 한잔씩, 안주 한 젓가락씩 몇 순배 돌고나니 한 병씩을 비웠고 한 병 이후부터는 한 명씩 떨어져나가면서 서열이 매겨졌다. 그 때의 내 주량은 두 병. 상위권이다. 지금까지도 소주를 즐겨 마시고 주량이 두병 정도이며 술잔을 한 번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 처음 배운 술버릇이 계속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본격적으로 술 세계로 빠져든 20대에는 주로 2,3차에 포장마차를 찾았다. 늦게까지 영업을 하기도 했고 그때까지는 포장마차의 안주가 비교적 저렴하기도 했지만 왠지 포장마차의 분위기가 좋았다. 천막으로 가려져 있지만 바깥의 공간이라 술맛이 좋았고 그 공간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지는 느낌이었다. 홍합이나 오뎅 국물 서비스 또한 포장마차를 찾게 되는 이유중의 하나였다. 돈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 국물과 오이 리필만으로 몇 병은 더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밤새도록 나눈 진지한 이야기와 고민들이 다음날 연기처럼 흩어져 뿌옇게 될지언정 당시의 느낌만으로도 술잔을 주고 받은 친구와의 진한 일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갈등이 잦았던 30대의 시절, 주로 집 근처 우이천 다리에 즐비하던 포장마차를 홀로 찾았다. 많은 포장마차 중에 이름이 맘에 들어 쉬어 가는 곳이란 곳만 들르다보니 주인 아주머니와도 인사를 나누는 정도가 되었다. 야외에서 술 마시기 딱 좋은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녔던 것 같다. 특히, 비 내리는 여름밤이면 발정난 개처럼 그 곳으로 달려가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시절 또 하나의 재미는 동틀 무렵이 되면 주인 아주머니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손님들과 각자 남아있는 술과 안주를 한 테이블에 모아 놓고 나누는 사는 얘기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모두가 사는 이유가 있었고 살아가면서 힘든 일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내가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하면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평범한 이웃들의 삶속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경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포장마차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도 했지만 주로 술 마시는 장소가 고깃집, 횟집, 곱창집등이었다. 포장마차의 분위기보다는 좋은 안주를 찾아다녔고 싼 안주보다는 맛있는 먹거리에 끌렸다. 그러면서도 포장마차가 주는 낭만에 대해서는 항상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버스 정류장 길가에 작은 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떡볶이와 순대, 오뎅 등을 파는 곳이긴 한데 할머니 뒤편으로 빈 술병이 보이는게 아닌가. ‘아하, 술도 파는구먼!!’ 이내 알아차린 나는 평상시의 그리움과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들어갔다. 포장마차 측면에 놓인 간이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순대 1인분을 시켰다. 소주도 있냐고 여쭈었더니 어딘가로 가서 두 병을 가져 오셨다. 허름한 천막과 술집 같지 않은 묘한 느낌이 주는 쾌감이 술맛을 더해주었다.

 

반 정도를 비웠을 때 옆 테이블에 아저씨 두 분이 오셔서 잔치국수를 주문하셨다. 포장마차 옆 길거리에서 목도리며 머리핀 등을 파시는 분이셨다. 국수는 이미 삶아졌기에 불어있었는데 오뎅 국물을 붓고 유부며 파, 김가루, 고춧가루 등을 얹으니 그런대로 먹음직스러웠다. 추운 날 장사를 하시다가 국수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시는 것이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고 왠지 몇 마디 라도 나누고픈 마음에 술잔을 권했다. 잠시 거절하시다가 이내 술잔을 받으셨다. 두 세잔 술잔이 오가고 나니 아저씨 중 동생뻘되시는 분의 말문이 트이셨다. 근처에서 막노동 일을 하는데 돈을 못 받은 얘기, 경기가 안 좋다는 얘기 등을 하시다가 또 다른 아저씨가 그만 일하러가자는 손짓에 아쉬워하시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만 나갈까하는데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둘이 들어왔다. 술도 어느 정도 마셨겠다 더 나아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두 친구들에게도 술을 권하니 기대도 안했다는 듯 약간 놀랬지만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둘 중에 형으로 보이는 친구가 동생을 만나러 이 동네에 들렀다고 했다. 둘 다 취업을 하지 못하고 근근이 알바로 용돈 정도만 벌고 있다고 했다. 얼마 안 되지만 떡볶이도 내가 사겠다고 호기를 부리며 술 한병을 더 시켰다. 둘이서 뭔가를 해보려고 고민을 많이 해보지만 사업자금도 없는 상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예전엔 내가 포장마차를 자주 찾았었는데.. 첨보는 사람과도 말을 섞으며 사는 얘기하는 걸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사람을 가리게 되고 새로운 만남을 거부하게 되었지?’ 아마도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기도 하고 실망도 하면서 지금의 내 모습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얼마 전 포장마차에서의 흥미로운 경험으로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술을 처음 배운 곳 포장마차, 밤새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었던 포장마차,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접하며 우리 사회의 내일을 고민했던 포장마차, 내게 낭만 그 자체인 포장마차. 앞으로 종종 정류장 앞 포장마차를 들러 낯선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를 나눌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 작은책 안녕하세요 차재혁 님. 소중한 글 투고 고맙습니다. 포장마차를 통해 보는 세상 이야기가 와 닿네요. 편집부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시일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9-03-20 14:58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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