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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씨앗에 대한 반성문

이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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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씨앗에 대한 반성문

 

지난 4월 어느 날 옥이 씨로부터 우리씨앗 여러 가지를 얻었다. 얻는 것도 좋지만 우리 것이라서 더 끌렸던 것 같다. 콩 두 가지, 배추 두 가지, 수수에 옥수수도 있었다.

5월 초순 어느 날 콩을 심었다. 삽으로 이랑을 지었고 거름이라고는 하지 않은 밭이다. 하나는 선비잡이콩이로 다른 하나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선비잡이콩은 겉에 무늬가 있었던 것 같고, 다른 하나는 검정색이었다.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예순 알 정도를 심었다. 밭에 오락가락하는 걸 본 이웃 어른들이 무엇을 심었는지 물으신다. 무엇이라고 할 것도 없는, 콩 몇 알을 뿌려 두었다고 계면쩍게 말씀드리곤 했다. 싹이 돋을 때쯤에는 새들을 걱정하신다. 어린 싹은 새들에게는 좋은 먹이가 된다. 다행히도 새들은 침범하지 않았다.

짐승도 어린 것이 귀엽듯이 식물도 그랬다. 귀엽고 고운 연둣빛에 햇빛이 쌓이고 비바람이 엉기고 하여 그런대로 자라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기쁨이었다. 보랏빛 꽃이 어울림을 더하는 사이 무더운 여름이 간다. 농부라고 할 것도 없지만,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는데 내가 심은 콩은 도무지 들을 게 없었다. 세월과 함께 뿌리도 제자리를 잡았을 터이니 무슨 탈이 있을까 하면서 잊고 지냈다. 장마와 무더위도 그 잊음을 거들어 주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모기가 입이 비틀어진다는 처서가 지나서야 밭을 찾았다. 참으로 무심한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콩대는 제 모습을 힘겹게 지키고 있었다. 잡초-<잡초는 없다>는 윤구병 선생의 책이 있지만-에 포위당해 있었다. ‘바람이 거세면 풀이 단단해진다고 했듯이 잡초를 견디는 콩이 참 우리콩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자기 핑계를 삼기도 했다. 풀을 헤치고 콩대를 살펴본다. 꼬투리도 제법 달렸다. ‘아하, 저렇게 해서 콩이 열리고 익어가는구나!’ 그리고 또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었다.

이웃에서는 콩타작을 하기도 한다. 내가 심은 콩은 어떻게 됐을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걸 보고 밭으로 간다. 그리고 콩을 꺾었다. 콩대보다 풀이 더 많고 콩대보다 풀이 더 컸다. 그래도 조금은 부푼 마음이었다. 설마 원금이야 챙길 수 있겠지. 땅은 거짓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며칠 있으니 옥이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콩의 안부를 묻는다. 지금까지 경위를 이야기했다. 우리씨앗나눔잔치가 있으니 그 전에 ‘수확물’을 챙겨 달란다. 기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꽤 불안했다. 귀한 우리씨앗을 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밭으로 가는 마음은 불안한 설렘이다. 11월 19일이었다. 50여 포기나 되는 콩대를 하나하나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런데, 그런데 … ? 꼬투리에서 콩알을 찾는 것은 일이 되고 말았다. 가뭄에 콩 나듯 한다는 말을 콩을 거둘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콩을 어렵게 심어 놓았는데 가뭄이 이어져 콩이 제대로 나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콩을 거두면서 그 말을 쓰는 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대부분이 빈 꼬투리이다. 어쩌다가 콩이 두 알 들어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수색을 끝내고 보니 콩은 한 주먹도 안 된다. 콩 한 알을 심어서 한 알도 채 거두지 못한 꼴이다. 이런 낭패가 있나? 과연 땅에는 거짓이 없었다.

콩대와 콩깍지를 보고 있자니 참 많이 부끄러웠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 생각이 난다. 인간은 자연의 품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원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원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만으로 삶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금을 갉아먹고 말았으니, 이런 낭패가 또 있을까?

옥이 씨한테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하지만 말로 하기는 어려웠다. 페이스북 메시지를 이용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토종을 야생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여 버려둔 게 불찰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우리씨앗나눔잔치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답장이 왔다. “ㅎ ㅎ ㅎ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하얀 종이 위에는 원금도 안 되는 콩알들이 햇빛을 받고 있다. 내년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원금도 채우고 이자도 챙겨야 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인물이 있으니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다. 이국 땅에서 목화씨를 감추는 삼우당 선생의 심정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말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본다. 씨앗은 누구의 것인가? 당연히 농민들의 것이라야 한다. 농민에게 씨앗은 어떤 존재인가? 농부아사침궐종자(農夫餓死枕厥種子)라고 했다. 농민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말이다. 농민에게 씨앗은 목숨보다 귀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 농민-소규모 자영농-에게 씨앗이 있는가? 없다! 그러면 누구에게 있는가? 자본이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씨앗만이 아니라 씨앗과 짝이 되는 비료와 농약까지 다 차지하고 있으면서 농민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씨앗을 지키려는 고단한 노력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 노력은 고귀하다.

원금조차 챙기지 못한 농사도 아닌 농사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땅은 거짓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내년에는 제대로 하겠다고 말하면 될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우리씨앗나눔잔치로 향하는 발걸음은 부끄럽고 무겁다.

  • 작은책 이영균 선생님 안녕하세요. 글 고맙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 2018-11-26 09:57 댓글삭제
  • 이영균 글을 좀 고쳤씁니다.

    틀린 글자도 있고 해서요.

    첨부파일로 보시면 됩니다.
    2018-11-28 11:45 댓글삭제
  • 작은책 예 선생님. 확인했습니다. ^^ 2018-11-28 16:59 댓글삭제
  • 작은책 전화드렸는데 연락이 안돼 문자 남겨드렸습니다. 시기를 봄에 맞춰서 다시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8-12-26 10:21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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