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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암으로 죽을 수 있다(1)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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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9일 천안 오빠가 단대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내가 들은 오빠의 증세에 대해 검색을 해봤다. 심각하다. 위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도 말기암. 팔순 어머니와 바보 오빠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베트남 새언니 덕분에 나는 간호사와 통화를 많이 했다. 731일 간호사는 나에게 언제 천안에 올 수 있냐고 묻는다. “월요일 갈게요. 간호사님, 오빠 상태를 제가 들으면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이미 중병으로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란 걸 알아요.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혹시나 제가 가기 전, 어머니께 오빠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씀하지 마셔요. 앞으로 제가 오빠의 주보호자가 될 겁니다.” 간호사는 그렇게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한 달 전 급성 위출혈로 고생한 남편의 내시경이 있는 날(31일 금요일)이다. 다행히 위는 깨끗해졌고 지난 번 출혈로 할 수 없었던 헬리코박터균 검사와 조직검사를 한다고 했다. 의사는 조직검사는 만일을 위해 해보는 거지 지금 상황으로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한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월요일 천안가려다 일요일 첫 비행기로 가기로 했다.

82일 새벽부터 일어나 제주공항에 갔더니, 청주공항 역에서 천안 가는 기차가 집중호우로 운행을 중지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제주항공은 그대로 운행을 한다고 한다. 청주공항에서 청주버스터미널로 가서 천안으로 갔다. 힘들게 갔지만 내가 다니는 동안 비가 안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더 이렇게 힘들게 천안을 오가고서 청주공항에서 바로 천안 가는 버스가 있다는 걸 알았다.

오빠를 만났다. 오빠는 병가를 쓰면, 일터에서 해고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그러나 단대병원 경비 소장이 몸부터 챙기고 일은 나중이라는 말을 듣고 아주 해맑아졌다. 나는 해맑은 오빠를 두고 오빠가 암일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가, 무서운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담당의사 면담신청을 하고 만났다. 주치의는 만날 수 없고 젊은 의사가 왔다. 의사는 검사결과가 수요일에 나올 예정이라 아직 본인도 정확하게 말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유도 질문을 했다. “위내시경 검사를 하고 간과 폐 그리고 대장을 검사하셨다는 것은 위 말고 다른 장기로의 전이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라고 봅니다. 그건 악성종양일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 거 아닙니까?” 의사는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내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나와 오빠는 똑같이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 오빠는 악성종양과 암이 같은 말인 줄 모르고 해맑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지금 오빠에게 필요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오빤 어찌된 영문인지 국가암검진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삼성SDI 하청을 10년을 다녔고, 3달 실업급여 받고는 바로 단국대병원 경비로 2년 넘게 일을 했는데 말이다. 나는 고용인이 국가암검진을 받지 않는 경우 벌금을 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모르겠다. 중요한 건 국가암건진을 받지 않아, 보건소에서 지급되는 암환자 돈을 받을 수 없다. 당연히 오빠는 보험도 없고 저축한 돈도 없다. 앞으로 오빠의 치료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 나는 동사무소, 구청, 보건소, 복지부 등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전화 상담을 했다. 나처럼 조금 배운 사람도 공무원이 하는 어떤 말들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제출해야 할 서류들이 너무 많았다. 당사자 오빠가 아닌 내가 준비하기에 어려운 것도 많았다. 그래서 병실에서 오빠 본인인증을 하고 복지부에 긴급의료비지원 신청을 제일 먼저 했다.

오빠 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에게 정확한 결과는 수요일에 나오지만 오빠가 암일 확률이 매우 높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안 좋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천안에서 더 하실 일은 없다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고 했다. 새언니는 2달 전부터 어린이집에서 급식 일을 한다고 한다. 5살과 8살 조카가 모두 휴대폰 하나씩 갖고 영상을 본다. 그나마 5살 조카는 낮에 어린이집에라도 가는데, 8살 조카는 방학이라 하루 종일 휴대폰이다. 어머니는 8살 손주를 데리고 양양에 가시겠다고 했다. 새언니에게 내가 어머니와 왕솔이를 데리고 양양 갔다 다시 천안 와서 수요일 검사결과를 듣겠다고 했다. 새언니는 오빠가 입원한 걸로 안심하고, 내가 아들과 시어머니를 데리고 양양 간다고 하니 아주 좋아한다. 어쩜 이렇게 부부가 똑같을 수가 있는지. 참 해맑다.(내가 오랫동안 천안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아이들의 치아 때문이다. 이는 새언니와 나에 대한 부분에서 다루기로 한다.)

천안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동서울 갔다가 양양 가는 버스를 탔다. 곳곳에 물난리다. 양양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이러다가 오빠보다 먼저 사고사를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양양에 가서 8살 왕솔이는 9살 민호 형을 만나 아주 신났다.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너무 걱정이 된 나머지 안 해도 될 말을 마구 하셨다. 아버지는 불안을 분노로 표출을 하신다. “그 놈의 새끼 죽던지 말던지 우리끼리 살아요. 나는 당신이 더 걱정이야. 나쁜 새끼.” 아버지는 오빠가 아픈 것도 걱정이고, 또 다른 돈 문제도 있을 거라고 짐작을 하셨다. 지난 28일부터 조용히 이 어려움을 견디시던 어머니께서 83일 양양에 도착해서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나도 어머니를 안고 같이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말씀이 다 옳아요. 지금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어머니와 저 그리고 아버지도 정말 힘들잖아요. 우리 가족 모두 서로에게 힘을 줘야 하는 시간입니다.” 내 품에 꼭 안기는 작은 몸이 된 어머니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정신을 잃은 멍한 눈빛의 아버지를 보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지금 이 시련은 하느님이 제게 주신 선물입니다. 제가 기도를 했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데레사야, 네가 해보렴. 네가 오빠 옆을 지켜라. 저는 그렇게 들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저를 믿고 그냥 기도를 열심히 해주세요. 저는 하느님 말씀을 따를게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신 부모님을 위로했다.

글 쓰는 지금도 나는 성당에 가지 않지만, 오빠를 지켰던 시간들이 내게 준 선물이란 건 안다. 그게 하느님께서 특별히 챙겨 준 선물이 아닐지라도 내게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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