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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달리는 택시 노동자 _송윤남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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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이 만난 사람

 

세월호와 달리는 택시 노동자 _송윤남

글·사진_ 안건모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에 있는 택시회사 한남교통, 회사 정문 앞에서 646일째(지난 7월 1일 현재)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송윤남 씨를 만나러 갔다. 송윤남 씨는 영업용 택시를 운행하면서 손님에게 세월호 리본을 나눠 주고, 손님이 허락하면 그 리본을 들고 사진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고 리본을 손님들에게 나눠 주는 택시 기사는 흔치 않다. ‘국민의힘’ 수구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부산에서 말이다.

 

송윤남 씨. 한남교통 정문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이었다. 한남교통 정문 앞에서 피켓을 앞에 두고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송윤남 씨였다. 피켓에는 “법대로 일했다! 마, 부당징계 철회하라!”라고 쓰여 있다.

일인시위를 하고 있는 송윤남 씨 사진을 한참 찍었다. 배차실에 들어가서도 사진을 찍었다. 송윤남 씨는 이 회사에서 소수 노조인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이다. 이쯤 되면 회사 쪽이나 부산택시조합(한국노총에서 바뀜)에 소속된 조합원들이 나와 시비를 걸 만도 한데 말을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5시쯤 일인시위가 끝났다. 서울에서 내려온 유이분 씨와 함께 컨테이너로 된 노조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허름한 노조 사무실이지만 이 사무실을 쟁취하기 위해 고공농성까지 하면서 2년 7개월 동안 싸웠다.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법대로 일했는데 왜 징계를 당했는지부터 물었다. 송윤남 씨는 부산 지역 말투가 아주 심하지는 않았다.

“2020년 1월 1일부터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이 개정이 됐어요. 법으로 바꿔 놨어요. 5시간 20분 임단협이 돼 있어요. 그래, 그 시간을 저희들은 일을 했죠.”

징계당한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가 2020년 1월 1일부터 사납급 제도를 없앴는데, 택시회사는 운송수입금 기준액을 정해 수납하는 변종 사납급 제도를 만들었다. 송윤남 씨는 그 제도에 반발해 원칙대로 운행을 한 것이다. 회사는 송 씨가 택시를 운행하려고 회사에서 차를 갖고 나가는 ‘출고’ 시간과 일 끝나고 다시 회사로 갖다 놓는 ‘입고’ 시간을 못 맞췄다는 것도 징계 사유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민주노총에 가입해서 미움받았다는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송윤남 씨와 같이 징계를 당한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조완재 씨.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면서 손으로 가리고 있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송윤남 씨 고향은 전남 고흥이다. 하지만 어릴 때 부산으로 와서 그쪽 추억은 별로 없다. 1년에 한두 번 아버지 산소에 가는 일 외에는, 어릴 때 기억은 그저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폭력을 많이 썼다는 기억밖에 없다. 

“여기 가야에서만 50년 살았어요. 아버지는 목수였고요. 야무지게 돈을 벌었으면은 좀 괜찮았을 텐데…. 술 먹고 매일 집에서…. 옛날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막 뭐가 날아다니고 그랬으니까…. 그런 생활을 좀…. 제가 군대 방위 받을 때 돌아가셨고요. 빨리 돌아가신 것 같아요.”

송 씨는 아버지가 폭력을 쓰면서 살아오신 걸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의식이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송 씨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거는 모르겠습니다. 누가 그러던데, 피 자체가 그냥 진보적이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한겨레(신문)도 처음부터 나오자마자 봤었으니까.”

 

송 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공장을 들어갔다. 그런데 어릴 적 기억이 흐릿하다. 처음 들어간 공장도 헷갈릴 정도다.

“부산의 대부분이 아마 철공소? 아니, 제일 처음에는 아미 공장이라고 전선을 이어 주는, 그 고무 같은 거 아실랑가 모르겠는데. 그라고 사출 공장, 그다음에 신발 공장을 들어갔어예.”

송 씨는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점점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마지막 일한 곳이 탄광이었단다. 송 씨가 마지막 탄광 세대였다. 

“태백 장성광업소, 2년 다녔죠. 막장에 가서 탄을 캤어요. 원래 거기도 군대같이 똑같이 훈련받고 그래요. 훈련을 3주 받고 들어갑니다. 동기들이 있고 그랍니다. 저희들이 마지막 기수가 됐습니다. 거기가 일이 힘들고 위험해서 임금을 많이 받을 수 있었죠. 근데 87년 투쟁이 일어나고 임금이 다 올랐잖아요. 그래서 거기 있을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게 방위 제대하고 난 뒤인가? 아마 87년 임금 오르기 전이었으니까.”

 

송 씨는 탄광에서 나와 다시 신발 공장을 들어간다. 그때부터 이미 송 씨는 건강한 노동자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점심시간 뒤에 줘야 하는 새참을 안 줄 때는 화장실 같은 곳에 회사에 항의하는 글을 남길 정도로, 이미 알게 모르게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이 좀 있더라고요. 야학도 있었지만 ‘도서원’이라는 데서 소모임 하고 활동을 좀 했었죠. ‘들불’, ‘일꾼’, 그 지역마다 한 군데씩 있었습니다. 그때 조성봉 씨라는 분을 만났고, 그분 때문에 수산대에서 결혼식도 했었죠.” 

아내는 신발 공장에서 일할 때 만났다. 

“아내는 거기서 재봉을 하고 있었고, 저는 재단하는 일을 했죠.”

 

부인 최정옥 씨와 단란했던 한때. 사진 제공_ 송윤남

 

결혼을 한 뒤 송윤남 씨는 신발 공장을 그만두고 신발 재단하는 일을 하청받아 사업을 했지만 금방 망했다. 송 씨는 다시 현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한 8년 정도 목수로 일을 하다가 상가 지으면서 제가 좀 다쳤습니다. 한 5미터 정도 되는 데서 뒤로 떨어졌어요. 다리가 다 마비가 되고….”

송 씨는 3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아이가 연년생으로 둘이었다. 그런데 3년 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치료를 받았으니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을까.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죠. 아이도 있었는데 제가 다쳐서 누워 있으니까 고생 많이 했습니다.”

3년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 수 있을지 막막했다. 아무래도 힘쓰는 일은 못할 것 같았다. 

“그때는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제가 성한 몸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뭘 할까 고민 끝에 택시 한번 해 보자 하고 시작한 게 지금까지….”

 

 

택시 운전 23년

송 씨는 그 뒤로 23년 동안 택시 운전을 했다. 23년 전 당시 택시 운전도 거의 막장 인생이라고 할 정도로 열악했는데, 23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을 했다니 송 씨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저는 입사한 날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사도 인정을 합니다. 성실하다는 거지. 입사하고 나서 집, 회사, 집, 회사, 12시간씩 근무 교대 했을 때 저는 한 23년 하면서 계속 교대 근무만 했었거든요. 이거 (노동)운동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수익금이) 톱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손꼽힐 정도였어요.”

 

이 한남교통 사업장에는 이미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있었다. 송윤남 씨는 그 노조에서 복지부장까지 했지만 회사 편을 드는 노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송 씨는 2014년 6월 1일 한국노총 소속 노조에서 탈퇴하고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부산지회 소속으로 가입했다. 

 

부산진구 가야대로에 있는 한남교통 본사 앞.

 

민주노총 공공운수 부산택시지회 한남교통분회 노동조합 사무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은 회사 근처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노조 사무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회사에 노조 사무실을 지어 달라고 요구했다. 회사가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었다. 택시회사 동료였던 심정보 씨가 생탁 노동자 송복남 씨와 부산시청 앞 광고판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송윤남 씨는 일을 마치면 농성장 밑에서 고공농성장을 사수했다. 그 당시 아내가 큰 힘이 됐다.

“아까 제가 여기서만 50년 살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제가 인사성도 밝고 지역 유지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집 문을 열면 바로 회사 앞이다 보니까 우리가 임시 노조 사무실로 천막 칠 때에 이런저런 힘을 많이 실어 준 게 우리 아내입니다. 조합원들이 30명이었잖아요. 서른한 번째 조합원이라고 할 정도로 아내가 많이 도와줬었죠. 음식도 날라 주고 일상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그라고 백남기 동지 싸울 때 물대포 맞을 때 아내도 제일 앞에 서 가지고 같이….”

 

신고리 5, 6호기 건설 백지화를 요구하며 집회에 참석한 송윤남 씨와 부인 최정옥 씨. 사진 제공_ 송윤남

 

알고 보니 송윤남 씨 아내도 적극적인 활동가였다. 송윤남 씨가 그 당시 몸짓패를 하고 있었는데 2015년 민중총궐기 때 같이 서울로 올라갔다.

“제가 잠깐 동안 몸짓패를 했었거든요.”

몸짓패 이름이 특이했다. ‘416’이다. 

“우리가 부산시청 앞 광고탑 위에서 생탁 동지들하고 우리 택시지부 심정보 동지하고 고공농성을 한 게 2015년 4월 16일이에요. 그날 몸짓패를 결성했었고, 그래서 416으로 하자. 그래 ‘노동예술단 선언’ 박현욱 동지가 우리 가르쳐 주고 그랬어요. 많이 배았습니다.”

 

집회에서 몸짓 율동을 하고 있는 송윤남 씨. 사진 제공_ 송윤남

 

몸짓패 416. 사진 제공_ 송윤남

 


송윤남 씨가 이렇게 적극 활동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회사를 좋은 직장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 회사는 근무 여건이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당연하게 기사들이 새로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한남교통도 택시를 157대 정도 소유하고 있지만 40퍼센트 정도는 운행을 하지 못하고 지금 고작 해 봐야 한 110대 정도 운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사들이 없습니다. 부산 시내 판이 그렇습니다. 지금 기준금, 회사에 내야 하는 기준금을 못 맞춰 넣어요. 젊은 사람들이, 있던 사람들도 다 빠져 갖고 콜 배달 영업으로 다 빠졌는데.”

하루에 15만 원 기준금을 내야 월급이 제대로 나온다는 말인데, 그 15만 원 벌기가 쉽지 않다. 그걸 벌려고 애쓰다 보면 마음이 바빠지고 피곤하고 자연스레 불친절하게 된다. 바뀐 운수사업법대로 월급제를 하면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데 회사에서 그걸 시행하지 않고 정부는 단속하지 않는다. 

 

송윤남 씨는 법으로 정해진 대로 월급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 현재 부산 시내에 만 명가량 있는 택시 기사들 가운데 하루에 6시간 40분, 주 40시간 일하는 사람은 단 두 사람, 한남교통 송윤남, 조완재 씨다. 심지어 송윤남 씨는 교대자도 없이 오전에만 일한다. 원칙대로 일하는 만큼 받는 임금이 적다. 한 달에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170만 원 정도다. 하지만 일하기가 편하다. 

“엄청 편합니다. 그리고 여유 있게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한테도 ‘그냥’ 친절하게 대할 걸 ‘엄청’ 친절하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모든 기사들이 사납금제를 거부하고 월급제를 한다면 당장은 임금이 적겠지만, 모두 똑같이 임금이 오르고 일은 편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송윤남 씨는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아십니까? 리본입니다

송윤남 씨는 택시 손님들에게 세월호 리본을 나눠 주고 세월호 사건을 상기시켜 준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고공농성 할 때 밑에서 적극 사수해 주는 동지들이 사회변혁노동자당이었습니다. 거기에 소속이 돼 있으면서 저희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세월호 선전전을 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부산 중심지, 서면 태화 중심지에서 집회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4월 되면 마음 아파하고 기억하자 해 쌓고, 행동하자 해 쌓고, 뭘 하자고 하는데, 나부터 계속 말로만 그런 것 같다는 생각에 ‘뭘 해야 되지?’ 제가 꾸준히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차에 세월호 노란 리본을 싣고 내가 일대일로 손님들하고 선전전을 해도 되겠다 하는 용기가 생기더라고.”

 

2015년 6월, 고공농성을 지지하며 연대 집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남준, 최정옥, 송윤남 씨. 사진 제공_ 송윤남

 

부산은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세월호 리본 때문에 싸운 적은 없다. 세월호 리본을 아냐고 먼저 물어보기 때문이다.

“제가 손님한테 선전전을 할 때는 리본을 보여 주면서 ‘혹시 아십니까? 리본입니다.’ 그러면 ‘세월호 리본이네예.’ 하면 ‘하나 드릴까요?’ 그러면 그때부터 대화가 됩니다. 손님들 대부분이 알아요. 제가 하루에 세 명이 목표거든요. 제가 보통 하루 나가면은 평균 열일곱 명 정도 태웁니다. 젊은 친구들은 받아 가려고 하고 ‘고생한다’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손님들한테 친절해야 돼요. 이렇게 세월호 리본을 달고 세월호에 대해서 이야기할 정도인데 내가 불친절할 수는 없잖아요.”

 

 

 

송윤남 씨가 승객들에게 나눠 준 세월호 리본. 사진 제공_ 송윤남

 

송 씨는 택시 기사라는 직업에도 자부심이 대단하다. 

“저는 택시를 하면서 택시 기사가 억수로 매력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다양한 곳에 갈 수 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나눌 수가 있잖아요.”

 

이렇게 즐겁게 일하는 송윤남 씨도 걱정거리가 있다. 가장 든든한 동지였던 아내가 병이 생겼다. 무리해서 생긴 병도 아니고 코로나 백신 때문이었다. 

“아내가 백신 화이자 1차 맞고 희귀병 진단을 받았었어요. 길랑바레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이에요. 지금은 병명이 또 바뀌었습니다. 이번에 동아대병원에서 재검진 판결이 났는데 소뇌위축증이라고, 공인된 치료약이 전무한 희귀 난치성 질환입니다. 운동신경을 관장하는 소뇌가 작아져 걷지 못하다가 전신마비에 이르는 병이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병원에서 셀카를 찍는 송윤남, 최정옥 씨 부부. 아프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사진 제공_ 송윤남

 

송윤남 씨는 혹시 자기 때문에 아내가 그런 병에 걸렸나 하는 자책감도 있다. 아무리 바빠도 아내가 치료받고 있는 재활원은 꼭 들른다. 

“오늘은 동아대병원에 약을 받으러 가고요. 내일모레 17일날, 서울아산병원에 재검을 다시 한번 받아 볼까 싶어서 아산병원으로 가려고 예약을 했어요.”

 

뒷이야기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송윤남 씨와 저녁을 먹었다. 차로 5분 정도 걸리는 식당이었다.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처음 먹어 봤는데 잡내가 없고 맛이 담백하고 구수했다. 김치와 매운 고추가 국밥 맛을 더했다. 유이분 씨와 내가 매운 고추를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송 씨가 놀라워했다. 밥을 먹은 뒤 변산으로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에는 12시나 돼야 변산에 도착한다고 나온다. 잠이 솔솔 오는데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며칠 뒤 글을 쓰고는 사실관계가 맞는지 확인을 해 달라고 글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답장이 왔다.

“자본주의가 아닌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윤남 씨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노동자. 정석대로 사는 사람이다. 한남교통은 빨리 징계를 철회하고 송윤남 씨와 대화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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