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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쓰여야 할 노동조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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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쓰여야 할 노동조합 이야기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대표 노무사 

 


나의 공인노무사 이전 직업은 일간지 신문기자였다. 어릴 적 꿈은 왠지 정의감이 넘쳐 보이는 ‘사회부 기자’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정보통신(IT) 특수 일간지 기자가 되었다. 매일 기사를 마감해야 하는 일간지 기자들은 출입처가 주어진 뒤 해당 분야를 충분히 배우고 익힐 여유도 없이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기사를 출고해야만 한다. 이공계 전공자도 아닌 나 역시 IT 관련 전문 지식을 습득할 틈도 없이 보도 자료를 기사화하고 짐짓 ‘아는 척’을 하며 취재원들을 만났다. 그리고 기사를 썼다.

20여 년도 더 지난 지금 회상해 보면 참 부끄러운 기억이다. 기자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려면 우선 그 ‘바닥’을 이해해야만 한다. 만약 그 분야가 필연적으로 대립되는 당사자 간 역학 관계로 인하여 ‘기삿거리’가 생산되는 곳이라면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그 현장에 대한 균형감 있고 깊이 있는 접근이 필수적일 것이다. 대표적인 취재 영역이 ‘노동’이다.

 

그런데 ‘노동 분야’ 중에서도 취재 대상이 ‘노동조합’이라면, 그것도 작업 현장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는 업종인 ‘건설 현장 노동자들의 노조’라면 어떨까. 게다가 대통령이 해당 노조를 ‘조직폭력배’로 규정하고 검찰, 경찰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압수수색을 펼치며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선정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면 기자들은 어디에서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어떻게 ‘기사화’할까.

기자 시절, 그 신문사에는 산업별 노동조합 지부가 결성되어 있었다. 입사 순서대로 노조 간부를 맡았고, 나도 어느 순간 임원이 되었다. 헌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는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라고 명시된 것들이 막상 부딪쳐 보니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교섭 석상에서의 우리의 요구는 항상 ‘생떼 부리는 이기적인 주장’으로 치부되었다. 불성실한 사측의 교섭 태도에 목소리라도 높이게 되면 ‘감히 사용자에게 대드는 불온한 세력’으로 취급되었다. ‘파업’을 언급하는 것은 그야말로 ‘회사를 망치려고 작정한 자들’의 극악무도한 시도로 비추어졌다. 

만약 어떤 노동자들이 그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안정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천신만고 끝에 노조를 결성하고, 정당한 노조 활동과 단체교섭을 하였는데 모든 언론이 하루아침에 이들에게 ‘파렴치범’, ‘조폭’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운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지난 5월 1일, 제133주년 세계 노동절, 한 건설 노동자의 부고를 접했다. 고인의 유서에서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업무방해죄, 공갈’이라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유독 가슴 아프다.

 

2023년 5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의 민주노총 건설노조 탄압에 항거하며 분신해 운명한 고 양회동 열사의 유서. 사진 제공_ 전국건설노조

 

 

고인의 죽음 뒤에 얼마나 큰 억울함과 헤아릴 수 없는 절망감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신문기자와 노동조합 간부를 경험해 본 나로서는 이 죽음이 ‘숨 쉴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간 결과’로 다가왔다. 숨이 막히고 비통했다. 

불법과 착취가 만연된 건설 노동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동자들이 투쟁과 교섭으로 얻어 낸 결과들이 한순간에 ‘공갈, 협박, 강요’ 등 척결될 대상으로 둔갑했다.

 

언론이 공격적으로 합세한 영향이 크다. 언론은 지난 수개월간 노동자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오로지 정부와 검·경의 노조 혐오 정서를 그대로 부각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최근 ‘노동조합’을 긍정적으로 다룬 기사를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건폭몰이’의 광풍 속에서 언론은 ‘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는지’, ‘그들의 채용 요구가 왜 단체교섭의 핵심 요구안이 되었는지’ 그 배경을 확인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잘 모르는 건설 노동 현장에 대해 ‘조직폭력배가 활개 치고 불법이 만연한 곳’이라는 막연하지만 선명한 프레임이 씌워지자 급기야 언론은 이에 대해 검증 없는 기사를 쏟아 내면서도 그것이 사회를 바로잡는 일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닐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어쩌면 대한민국 보통의 사람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가 언론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노동조합 조직률이 10퍼센트 초반대에 불과한 나라다. 학교에서 노동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고, ‘업무의 정상적 흐름을 방해하는’ 파업권을 헌법으로 보장한다는 사실을 아는 노동자가 많지 않다. 그런 나라에서 정권과 언론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노조를 범죄 집단으로 낙인찍을 때 노동자들은 어느 순간 누구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은 지난 2월 28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 제공_ 전국건설노조

 

이제부터라도 처음부터 다시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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