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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자살은 산재가 맞아요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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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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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자살은 산재가 맞아요

권동희/ 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

 


그때 산재 불승인 통지서를 받아 들고, 저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수긍할 수 없었지요. 당신의 아버지는 구조조정의 위기에 무척이나 괴로워하셨고, 본인보다 다른 부하 직원들이 해고될 것에 대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왔었어요. 그런데 공단과 판정위원회는 ‘이타적 자살은 산재가 아니다’라고 했어요. 나중에 정보 공개를 통해 받아 본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판정서는 “이타적 자살은 판단력 상실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기는 어렵고 더욱이 아직 인원 감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비효과를 기대하며 자살한 것은 병적 상태이거나 판단력 상실로 보기 어렵다.”라고 명시하고 있었어요.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당신 어머니의 충격, 그리고 장남으로서의 죄책감은 제가 이 사건을 준비하는 내내 깊이 느꼈던 감정이었는데, 산재 불승인 통지서는 고인의 고귀한 죽음의 의미를 너무 형해화시켜서 한동안 어쩔 줄 몰랐어요.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를 보더라도 당신의 아버지는 참 온기가 있는 분이었어요. 그렇게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유서에는 가족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품고 있었어요. 한편으로 동료들에게 남긴 유서에서는 자신의 죽음이 나비효과가 되어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판정위원회는 이타적 자살을 언급했고, 산재가 아니라고 단언했어요. 

 

왜 이타적 자살은 산재가 될 수 없다고 공단은 확신하는지 저는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사회학 용어인 ‘이타적 자살’이 판정위원회 판정서에 나온 것도 너무나 뜬금이 없었어요.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숙명적 자살의 분류는 오래전 에밀 뒤르켐이라는 사회학자의 정의예요. 노동자의 자살이 산재인지 아닌지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었는지, 그로 인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인지 여부가 중요해요. 그런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와 판단은 전혀 이루어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사회학의 용어를 법률적 판단에 끌어들이는 판정위원회 판정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이타적 자살이라도 산재가 맞다”고 저는 확신했고, 법원에서 판정받고 싶었어요. 당신도 아버지의 죽음이 산재라며 소송을 해 보자고 했어요. 

 

산재 신청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조사했던 동료들의 면담 기록을 다시 한번 뒤져 보았고, 당신의 아버지가 쓰던 컴퓨터 액세스 기록도 재정리했지요. 대기업 위탁 하청업체라는 특징 때문에 구조조정의 위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자동화 사업 확대로 인해 고인의 업체를 포함해서 여러 업체가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조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고인의 유서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번 살펴보았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제주도로 가서 고인의 동료들을 만나 소송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었지요.

행정소송을 통해 단 한 번도 이 사건에 대해 도와주지 않았던 원청 회사와 소속 회사에 대한 사실조회를 진행했었고, 고인의 의무기록과 스트레스 내역을 기초로 해서 정신건강의학과에 상세한 진료기록 감정을 했었지요. 제가 가장 주력했던 사항은 “자살 자체가 판단력 상실 또는 정신병적 상태로 인한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진료기록 감정 의사는 우리의 손을 들어 주었지요. 

 

오랜 소송 끝에 서울행정법원은 “망인의 진료기록 감정의는 ‘망인은 직장 동료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이 사건 사업 시행에 따른 인원 감축과 업무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유서의 내용에 비추어 망인이 억울하고 막막한 심리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망인은 직장 내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및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으로 자살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인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심각한 판단력 상실이 동반된 것으로 생각된다.’"라는 내용의 의견을 제시했어요. 위와 같은 사정과 망인의 유서 내용, 앞서 본 망인의 업무 등에 따른 스트레스 등에 비추어 보면, ‘망인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이 사건 사업 확대 시행에 따른 스트레스는 망인의 사망 당시까지 계속하여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왔고, 망인은 그로 말미암아 당초 진단받은 수면장애, 불안 및 우울병 장애 등의 정신질환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으며 그러한 정신질환의 악화로 정상적인 판단 능력 등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판단했지요(서울행정법원 2018. 4. 26. 선고 2015구합 82846판결).

 

소송이 마무리되고 제주도로 아이들과 여행을 가면서 당신의 어머니를 찾아뵌 적이 있었어요. 당신의 부탁이기도 했고, 어머니께서 저를 꼭 보고 싶다고 했었어요. 제가 갔을 때도 고인의 물건은 아직 치우지 않았었지요. 저와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고인이 살아 계실 때 당신의 아버지와 오름을 오르며 고사리를 뜯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이들과 나올 때 한라봉을 제게 선물해 주셨는데, 저는 아직도 제대로 된 선물을 해 드리지 못했네요. 저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이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아버지처럼 말이죠. 언젠가 제가 좋아하는 용눈이오름에 오르는 날이 온다면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꼭 다시 기억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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