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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와 불가촉천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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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와 불가촉천민 사이

 

최태경/ 경남CBS 프리랜서 아나운서

 

2021년 12월 31일, 저는 2년 8개월 동안 일했던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했습니다.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고, 해고된 지 10개월 만에 저는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반쪽짜리 복직 상태입니다.

 

저는 경남CBS에서 ‘지금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최태경 아나운서입니다. 제 방송 경력은 10년이 넘습니다. 모두 프리랜서로 일을 했고요. 그중 CBS에서만 일한 기간이 7년 4개월입니다. 부산CBS에서 2년, 울산CBS에서 1년, 경남CBS에서 1년 8개월, 다시 경남CBS에서 2년 8개월. 스스로 CBS 사람이라고 자부할 만큼 회사에 대한 애정이 컸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슈퍼 을’이었습니다. 경남CBS에 첫 출근을 하자마자 정규직의 업무를 맡았으니까요. 정규직은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광고 편성 업무를 하루 5번씩 했고, 사옥 이사를 앞두고는 직원들과 먼지 마셔 가며 이삿짐을 싸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방송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서 온 엔지니어로부터 밤 10시가 넘도록 교육을 받기도 했고요. 방송통신위원회에 방송국 재허가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밤샘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규직 아나운서들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할 때마다 모든 정규직 업무는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 모든 일에 보상은 없었지만 해내야 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CBS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정규직 아나운서가 채용됐습니다. 그리고 경남CBS에서 일한 지 2년 8개월 만에 저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해고당한 뒤에 저는 ‘아나운서’에서 ‘아나운서 지망생’이 됐습니다. 프리랜서라면 아나운서와 아나운서 지망생을 오가는 삶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아나운서가 된다 하더라도 짧으면 몇 개월, 길어도 2년을 일하지 못합니다. 방송사는 부품을 갈아 치우듯 새로운 얼굴로 화면을 채우고,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은 또다시 ‘의자놀이’에 등 떠밀립니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부는 연말연초면 방송 취업 시장에는 아나운서였던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춰야 할 경쟁력은 외모입니다. 때문에 프리랜서 아나운서에게는 ‘내돈내방’ 즉, ‘내 돈 들여 내 방송 한다’가 불문율입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방송 한 편당 출연료 혹은 방송 단가가 책정돼 있습니다. 물가가 아무리 올라도 출연료는 오르지 않습니다. 방송 한 편에 출연하기 위해 들이는 준비 시간, 대기 시간, 녹화 시간 등을 따지면 출연료는 최저시급을 밑도는 수준입니다. 때문에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비용과 식대, 교통비까지 자비를 들여야 방송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관행을 당연시하는 것이 방송계의 현실이고요.

 

출연료를 올려 달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담당 PD로부터 돌아오는 답변은 ‘너 말고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많다’입니다. 저 역시도 최저시급을 밑도는 방송 단가를 올려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20만 원 정도 월급이 깎였고요. 당장 몇 개월 혹은 1년 뒤 계약만료 통보를 받게 될지 모르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시키는 일은 다 하되, 급여는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을 중의 을입니다.

 

저는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아나운서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용기를 내서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습니다. 거대한 방송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법적 분쟁을 준비하면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름만 프리랜서였지 노동자였구나.’ 하고요. 9개월 동안 부당해고 구제 절차를 거쳤고, 경남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저를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CBS에 저를 ‘원직 복직시키라’는 구제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측은 저에게 복직 이행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복직 이행 명령서를 받은 날,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 정규직으로 떳떳하게 일할 수 있겠구나.’ 싶었거든요.

 

작년 10월 4일, 저는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제 책상에 있어야 할 컴퓨터가 치워져 있었습니다. 총무국장은 ‘앞으로 컴퓨터 등 비품을 지급할 수 없으니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제 고정 좌석도 프리랜서 공용 좌석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근로계약서는 언제 작성하는지 문의했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원직 복직을 시키라고 했으니 우리는 너를 예전에 일했던 프리랜서로 복직시킨다. 때문에 근로계약서는 작성하지 않는다. 프리랜서 계약서도 작성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썼던 6개월짜리 프리랜서 계약서를 연장한다.’였습니다. 사측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로 전환됐다’는 노동위의 판단은 무시하고, ‘원직 복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저를 프리랜서로 복직시켰습니다. 노동위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노동위는 뒷짐만 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사측은 차례차례 저의 근로자성을 지워 갔습니다. 편성팀장은 방송 원고 결재 라인을 없앴습니다. 제게 직접적으로 업무 지시를 하지 않기 위해 회사에는 제 전용 서류함이 생겼습니다. 제게 지시할 사항이 적힌 서류를 서류함에 두면 제가 수거해 가는 겁니다. 늘 참석하던 아침 직원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오후 6시까지 남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제지당했습니다. ‘아나운서’라는 이름도 방송에서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서울 본사는 경남CBS에 ‘최태경과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출근 인사도, 퇴근 인사도 무시당했습니다.

 

복직한 뒤 최태경 씨의 자리. 경남CBS는 지방노동위와 중앙노동위로부터 정규직로 원직 복직 명령을 내렸으나 이를 임의 해석하여 프리랜서로 다시 근무하게 하고 업무용 데스크탑 PC도 치워버렸다. 사진 제공_ 최태경

 

복직 후 근로 환경은 더 후퇴했고, 저는 불가촉천민이 됐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서 또다시 고민을 했습니다. 이미 방송 비정규직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정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속속 원직 복직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프리랜서 원직 복직’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자칫 제가 나쁜 선례로 남을 수 있었고, 방송사들이 악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11월 10일 서울에 있는 CBS 본사 앞에서 ‘정상적인 원직 복직을 이행하라’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후 사측은 중앙노동위의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저의 두 번째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최태경 씨가 '경남CBS의 아나운서 꼼수 원직복직 규탄 기자회견'(2022년 11월 10일, 목동 CBS 본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공_ 최태경

 

‘정의공론, 정론직필’. CBS가 추구하는 언론의 방향입니다. 언론은 불의를 알리고 이를 바로잡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언론이 입법·사법·행정부에 이어 제4부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회에 정의를 요구하던 언론이 이제는 정의를 요구받는 시대가 됐습니다. 방송사가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방송 제작 과정에서부터 정의와 공정을 실현해야 합니다. 정의는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에서 실현돼야 합니다. 정의는 셀프입니다.

 

많은 방송 비정규직들이 지금껏 가 본 적 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셰르파가 되어서 거대 방송사라는 험준한 산을 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발자국 위에 발자국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 길은 언론사가 신뢰를 회복하는 바른 길, 정도가 될 것입니다. 말과 글로만 외치는 죽은 정의가 아니라 행동으로 살아 있는 정의를 실천할 때, 언론은 비로소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언론사 대표들이 2023년 신년사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했던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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