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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 공직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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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 이야기_ 지역공공병원 만들기(3)

 

의료인 공직의 시대로

 

문정주/ 의사.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 저자

 

 

병원의 생명은 의사와 간호사에 있다. 잘 지은 건물과 첨단 의료 장비에 최신 전자 업무 체계가 있다고 해도 의료진이 없으면 허깨비나 다름없다. 실력 있는 의사, 믿을 만한 간호사가 있어야 병원이 되고 그와 같은 의료인을 다수 확보해야 좋은 병원이 될 수 있다.

지방에서, 특히 소도시나 농어촌에서 좋은 병원을 만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의료인이 수도권과 대도시를 선호해 지방으로 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들-문화적 수준이 높고 자기 발전의 욕구가 강한 의사들은, 지방 병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구인 광고를 내고 지연과 학연을 동원해 사방으로 노력해도 지방에 오겠다는 의사를 찾기 어렵다. ‘필요한 전문 과목 의사를 충분한 숫자로’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다를 바 없다. 사립병원뿐 아니라 공공병원 사정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공중보건의사(병역 의무를 대신해 의료 취약지에서 근무하는 의사)를 몇 명씩 배치해 주기는 해도 필요한 인원을 다 채워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공공병원에는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 필수 의료를 유지할 의무가 있어 ‘의사 모시기’의 부담이 사립병원보다 더 크다.

 

사진 갈무리_ 국립중앙의료원 매거진 OO(공공) 2호

 

공공병원에 고액 연봉이라니

의사에게 지방 공공병원은 선뜻 가고 싶은 직장이 아니다. 단순히 시골에 있어서가 아니라 업무 부담 때문이다. 진료과별 의사가 보통 한두 명, 많아야 서너 명인 조건에서 외래환자 진료, 수술이나 내시경 검사, 입원환자 회진과 상담, 중환자실 진료, 응급실 호출 등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란다. 전공의가 없으니 모든 게 전문의의 몫이라 단순 반복 업무에 세월이 간다. 퇴근 뒤 야간이나 주말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수시로 병동 간호사실이나 중환자실에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는다. 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법으로는 보장되어 있지만, 나 대신 다른 의사가 일을 맡아 줘야 하므로 일 년에 며칠 쉬기도 쉽지 않다. 전문의로서 학회 활동이나 연구에 참여하고 싶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남들이 알아주는 병원도 아닌데 이처럼 업무 강도는 중하고 근무 환경도 열악하다.

그와 같은 애로를 병원 운영진도 알지만 어쩌지는 못한다. 다만 의사 연봉을 올려 줄 수 있을 뿐으로 구인난이 심할수록 연봉이 올라간다. 재작년 지방의료원의 고액 연봉이 매스컴을 타고 화제가 되었다. 새로 의사를 고용하면서 연봉 5억 3천만 원에 계약했다는 것이다. 보통 3~4억 원을 주는데 의사 구하기가 원체 어려워 크게 올랐다고 했다. 많은 국민들이 분개했다. 그때가 마침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정책에 반대해 파업을 벌이던 때였으므로 방송 댓글 창에는 의사들의 갑질, 밥그릇 욕심, 집단 이기주의에 몸서리를 치는 글이 줄을 이었다.

내게 그 고액 연봉은 정부의 무책임을 고발하는 표상으로 읽혔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라 할 때 국민 건강을 위한 의료는 국방, 치안, 소방, 교육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필수 기능이다. 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공공병원 등 공공의료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며 유럽을 포함해 선진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이를 이행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에 소홀해 공공병원이 극히 적고, 병원에 꼭 필요한 인력을 확보할 방안도 마련하지 않았다. 국방을 위한 군인, 치안을 위한 경찰관, 소방을 위한 소방관, 교육을 위한 교사가 국가 공무원으로서 신분과 지위를 갖지만, 공공의료를 위한 의사에게 국가 공직은 지금껏 없다. 공공병원은 있으나 공직 의사는 없는, 손발이 잘린 채로 뛰어야 하는 상황이 공공의료의 현주소다.

이런 현실에서 의사를 구해야 하는 병원 운영진의 수단은 오직 연봉 올리기뿐이니 그 액수가 높을수록 의료에 무책임한 정부에 매겨질 낙제 점수는 바닥을 긴다.

“문제는 의사 부족이야! 공직 체계가 아냐.”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 의사가 부족하다. OECD 회원국에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가 평균 3.6명인데 우리나라에는 2.5명(2021년 기준)밖에 되지 않아 중간은 고사하고 거의 꼴찌 수준이다. 의사 부족은 지방 병원의 구인난, 지역 간 의료 불평등, 감염병 대응 부실 등 의료 문제 대부분에 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의대 정원을 확대하려는 정책이 의사들의 반대로 유보된 만큼 가까운 미래에 나아지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의사만 많아지면 될까? 그러면 저절로 지방 공공병원이 좋아질까? 저절로 소도시와 농어촌에 필수의료가 활발히 제공될까? 그럴 리가 없다. 지금과 같이 미흡한 제도 아래서는 그런 ‘저절로’가 불가능하다.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서는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공병원이 의사가 전문성을 펼칠 만한 직장이 되게, 지역 곳곳에 지금보다 공공병원이 훨씬 더 많아지게, 정책과 노력이 앞서야 한다. 애초에 의사가 많건 적건,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책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이제라도 공공의료 강화와 이를 위한 공직 체계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단비와도 같은 공공임상교수제

다행히 반가운 소식이 있다. 교육부가 공공의료 인력 증원을 위해 국립대학병원에 새로 공무원 교수 직제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공공임상교수’라 이름을 붙인 이 직제에는 대학병원이 지방 공공병원으로 파견할 의사가 임용된다. 대학병원 소속 교수이면서 실제로는 공공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다. 교수는 응급의료·심혈관질환·뇌혈관질환·분만·신생아·감염병 등 필수의료를 담당하며 대학병원과 공공병원 간 협력의 중심이 된다. 전공의를 파견할 수 있게 두 병원 간 통합 수련 과정도 개설된다. 교수의 보수는 국고에서 절반, 공공병원에서 절반 부담한다. 필요한 교수가 1400여 명에 이르며 올해는 시범으로 그중 150명이 임용된다.

이 소식은 지방 공공병원에 단비와도 같다. 병원이 의사를 구하려고 애태우지 않아도 전문의와 전공의가 확보된다. 의료 수준이 높아질 뿐 아니라 병원 운영도 안정된다. 대학병원과 협력 관계가 튼튼해짐에 따라 지역사회에서 공공병원의 위상과 신뢰도 향상된다.

공공의료에 뜻을 둔 의사에게 이 직제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무엇보다 공직자로서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 원래 공공병원이 지닌 큰 장점이 의사가 소신껏 ‘수익이 아닌 환자를 위한’ 진료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공임상교수는 이 장점을 더욱 확실하게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전문의가 늘고 전공의도 파견돼 공공병원에 인력이 보강되면 교수는 전문적인 의술을 시행하고 학술 활동과 연구에도 업적을 쌓을 수 있다.

국립대학병원에도 변화의 계기가 된다. 그동안 국회에서 “공공성을 포기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교육부의 연구비를 받고 보건복지부의 시설과 장비 지원을 받으면서도 “정작 공공의료의 중추 역할은 하지 않는다.”라고 비판을 받았던 터였다. 이처럼 부정적인 시선을 바꾸는 데 공공임상교수제가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지방 공공병원과 밀접하게 협력해 선한 영향력을 키우면 국립대학병원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높아진다.

광역 지방자치단체에 공공임상교수제는 자기 노력의 결실이다. 이 직제가 성사되게 한 주역이 바로 전국시·도지사협의회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이 한창이던 작년 여름, 협의회는 국립대병원협회,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와 손잡고 공공임상교수제를 정부에 제안했다. 공동 제안이라는 형식에도 의의가 있지만, 지자체장 전원이 공공의료 강화에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정책적 의의가 크다. 시·도는 앞으로 수요 파악과 재정 지원 등을 맡아 중앙정부와 함께 직제 운영에 참여할 예정이다.

 

의료인 공직의 시대로
첫 시범 사업에 관계자들은 걱정이 많다. 정책이 확정된 시기가 작년 연말로 늦어 교수 모집에 홍보가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바란다. 뜻있는 의사가 정원을 꽉 채워 임용되기를. 의사의 공직 시대를 열기를. 앞으로 간호사 등 다른 인력을 위한 공직도 마련되기를.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도 국가의 책무 이행 수준이 높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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